“지난 86년 11월8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친위 쿠데타를 도모했다.” 박철언 전 의원의 위 발언이 논란을 빚고 있는 가운데, <일요서울>은 새롭고도 충격적인 정보를 입수했다. <일요서울>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실제로 ‘비상선진계획’으로 명명된 친위 쿠데타 계획을 세웠으며 11월8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권 연장을 꾀하려 했으나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던 미 CIA에 의해 좌절됐다는 것. 친위 쿠데타 발발 직전, 전두환 정권의 움직임과 이를 저지하려는 CIA의 대응 등 긴박했던 7일간의 막후 비화를 공개한다.지난 86년 전두환 대통령은 과연 친위 쿠데타를 계획하였을까.

이와 관련, 박철언 전 의원은 최근 발간된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86년 9월 26일 오후 6시 전 대통령과 장세동 부장, 박희도 육참총장, 고명승 보안사령관, 안현태 경호실장 그리고 나(박철언 당시 비서관) 여섯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비장한 어투로 ‘학원 데모 현상이 점점 좌경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원수직을 물러난다면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도탄에 빠진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 누군가가 정리하여 안정을 이룩한 후에 인계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전 대통령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하에 단시간에 처리할 수 있는 것은 계엄령이다. 전국적 사태가 시끄러우면 국방부가 안기부에 제출한 북한의 군사 상황 등에서 명분을 찾아라. 사회 혼란 극복을 위해,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해,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계엄 조치를 한다… 학생 운동이 도시 게릴라화되고 있다. 모든 것이 야당과 무능한 정치인의 책임이다… 대학을 너무 풀어놓았다. 너무 풀어놓았으니 때릴 때는 때려야 한다’라고 강경하게 주문한 뒤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계엄령은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니 헌법과 국회를 살려두고 할 것인가를 결정하라. 불순한 국회의원을 검거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하고…계엄 분소 설치는 인천에는 17사단에 계엄지부를 설치하라. 전국적으로 위력 시위를 하라. … 20사단이 서울로 들어올 필요는 없다.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 대기토록 하라. 계엄령은 6개월 정도는 해야 한다’고 말을 맺었다.”이날 이후 친위 쿠데타 계획은 전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장세동 안기부장의 주도로 치밀하게 진행된다. 청와대 지하 벙커에 계엄상황실을 설치하는 것을 필두로 구체적인 타임스케줄에 들어간다. 여기에다 잇달아 터져나온 정치권 및 학원의 일련의 사태도 쿠데타 계획에 불을 붙였다. 이른바 10월14일에 터진 유성환 의원의 ‘국시 발언’과 10월28일 발생한 건국대 사태가 그것이었다.

YS, JP는 안기부 연행키로

당시 신민당 유성환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통일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보다 상위 개념이다”라고 발언해 전격 체포되었다. 또 건국대 사태는 전국 27개 대학에서 모인 농성 학생 1,219명 전원이 연행되었다. 이런 사태는 전두환 정권에 호재로 작용했다. 극심한 사회 혼란상을 이유로 친위 쿠데타는 모의를 거쳐 실행 단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와 관련, 전두환 정권의 외교 안보라인에 깊숙이 관련돼 있었던 한 인사는 <일요서울>에 비화 한 토막을 전했다. “그 무렵 그런 모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전두환 대통령을 추종하는 군과 안기부의 실력자들은 사전에 치밀한 논의를 거쳐 실행 날짜까지 잡았다. 10월 중순경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처음 그 계획을 들었을 때 나는 ‘군에서 또 나오는구나’하고 내심 우려되었다.

의장이 돌아가며 의견을 물었다. 다들 동조했다. 어떤 이는 ‘내친 김에 정계 개편까지 하자. 걸레 같은 정치인들 때문에 나라가 엉망이다’라고 강경 조치를 요구했다. 내 차례가 와서 말했다. ‘비상계엄 같은 조치는 다른 나라는 몰라도 주요 우방국엔 사전 설명이 필요하다’고. 참석자 중 일부는 내 견해에 공감을 표했으나 군 실력자들은 ‘그까짓 것…’하며 밀어붙였다. 이후 정국은 예기치 못한 일들이 잇달아 터져나왔다. 김대중씨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했고, 여권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김대중씨가 불출마 선언을 했기 때문에 쿠데타 계획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미 CIA와 전두환 정권 실력자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고도의 전략이 오갔다.”

DJ, 군에서 죽이든가 외국행

이 인사에 따르면 CIA 한국지부는 전두환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계획을 사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1월8일 비상국무회의를 소집, 자정을 기해 국회 해산과 동시에 계엄을 선포하고 11월16일에는 `민주정치발전국민회의’를 발족한 다음,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을 통과시킨다. 87년 2월 계엄은 해제하되, 비상조치는 계속한다는 일정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CIA는 친위 쿠데타 직후 YS와 JP를 연행, 안기부에서 수사하고 DJ는 군에서 죽이든가 외국행 중 택일토록 강요한다는 계획도 입수했다는 것. 이 인사는 “DJ의 대선 불출마 선언이 나온 배경과 특히 날짜를 주목해보라”고 귀띔했다. 이는 다시 말해 DJ가 독자적 판단으로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쿠데타 계획을 입수한 미국정부가 DJ에게 정보를 흘렸고, 위기를 느낀 DJ는 고심 끝에 불출마 선언을 했는데 그 때가 쿠데타 D데이 3일 전이었다.미국 정부는 여기서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79년 12·12 쿠데타로 전두환 군부에 쓴 경험을 당한 미국이기에 쿠데타 차단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7개월 후인 87년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은 탱크를 동원, 강경 진압하려 했으나 미 정부의 강한 압력으로 포기하고 만다. 이 역시 86년 11월의 전두환 친위쿠데타 계획에 미국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짙게 암시하는 반증이다.

# 두 번째 친위쿠데타도 미국이막았다 - 전두환 정권 6·10항쟁 때도 쿠데타 계획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임기 말에 두 번에 걸쳐 친위쿠데타를 계획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그 첫 번째는 86년 11월 일명 ‘비상 선진 계획’이었고, 또 한 번은 87년 6·10 항쟁 직후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전두환 정권은 미국측의 개입과 압력으로 쿠데타 계획을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미국측의 압력과 국내외 정치환경 변화로 첫 번째 쿠데타 계획을 접은 군사정권은 이듬해(87년) 6월 민주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또다시 친위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당시 국민들은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과 정통성 결여 등 비민주성을 성토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전두환 정권은 87년 4월13일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하기에 이른다.이런 와중에 서울대에 재학중인 박종철씨가 경찰의 고문으로 살해당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6월10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렸다. 여기에 출정식에서 이한열 열사가 또다시 희생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유혈진압 등 제2의 광주 참상을 자행하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두 번째 친위쿠데타를 계획한 셈.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쿠데타 계획을 눈치 챈 미국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당시 릴리 대사는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전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계엄령을 지시한 전 대통령은 릴리 대사의 면담을 피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 대통령을 면담한 릴리 대사는 계엄령 반대 뜻을 강력히 밝힌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계엄 반대 의지를 분명히 했다.6월19일 이미 군 동원령을 내린 상황에서 미국의 강력한 반대 의사는 전 대통령을 또다시 궁지로 몰아 넣었다. 고심 끝에 전 대통령은 릴리 대사 면담후 계엄령을 철회했다. 레이건 대통령 등 미국의 압력이 또 한차례 대규모 유혈사태를 막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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