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하지만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묘두현령(猫頭縣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권문세족과 부원배들의 저항을 뚫고 어떻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느냐였다. 이제현은 실력이 없는 세도가 자제들이 등과할 수 없도록 엄격한 과거 심사기준을 확립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인재를 3단계로 나눴다.
첫째는, 학문이나 문장에도 능하고 관리로서의 재능도 뛰어난 자(能文能吏 능문능리). 둘째는, 학문이나 문장에는 능하지만 실무 능력이 떨어지는 자(文而不能吏 문이부능리). 셋째는, 실무에는 능하나 학문 혹은 문장이 뒤떨어지는 자(吏而不能文 이이부능문). 3단계의 인재들 중에서 2단계 안에 들지 못하는 인재들은 등과에서 제외되었다. 당연히 권문세족, 부원배들이 누려왔던 권력세습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마침내 이 향시(鄕試)에서 26세의 이색(李穡)이 일등으로 합격했으며, 김구용(金九容) 등 등과자 35인이 발표되었다. 이색은 이미 19세 때(1346년)에 성균관에서 주재하는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한 관록이 있었다. 
그러나 이 합격자 선정 결과에 대해서 세간에서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대부분 낙마한 응시자들의 부모인 권문세족, 부원배들이 지어낸 것들이었다. 그 중 기철의 측근인 경양부원군 노책(盧)은 공민왕에게 과거시험의 부정 여부를 파헤칠 것을 간하였다. 
“전하, 이번 과거시험에서 권문세족과 재추(宰樞)의 자제들이 단 한 명도 등과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이는 필시 무슨 음모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어 과거시험 감독 소홀과 그에 따른 책임자를 엄중히 처벌하셔야 하옵니다.”
이는 노책이 요로를 통해 인사 청탁을 했던 자신의 넷째 아들 영(瑛)이 과거에 낙방한 것에 대한 정치보복이었다. 상소문은 기철 도당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기철의 동생 기주(奇輳)가 다시 이제현을 탄핵했다.
“이번 과거시험이 문제가 있었다는 명백한 증좌는 익재 대감의 제자인 이색이 일등으로 등과를 했다는 사실이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도 유분수였다. 졸지에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이제현은 어전에 나아가 공민왕에게 상주했다.
“전하, 소신은 가문이나 문벌보다는 관리로서의 실력이나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우선 선발하였사옵니다. 명예를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소신이 무엇이 부족해서 부정을 저지르겠사옵니까?”
이어서 동지공거 홍언박이 이제현을 비호했다.
“전하, 시험 답안지에는 출신지, 가문, 성명 등을 모두 봉인하고 채점을 하고 있사옵니다. 부정이 개입할 소지가 전혀 없사옵니다. 익재 대감의 문하생인 이색이 부정으로 수석 등과를 했다는 기주의 주장은 전혀 사실과 다르옵니다.”
이제현이 홍언박의 말을 받아 다시 죄 없음을 주장했다.
“전하, 만약 이번 과거시험에서 신을 비롯한 시험 감독관들이 단 한 건의 부정이나 잘못을 범한 사실이 발견된다면 신은 자진(自盡)으로써 신의 결백을 증명하겠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제현의 결연한 목소리가 대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공민왕은 이제현의 인품을 믿고 있었던 터라 자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어사대에서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진상을 조사하도록 하라!”
하지만 어사대에서는 기철 도당이 주장한 것처럼 권문세족들의 자제들을 낙방시키기 위한 어떠한 음모의 흔적도 밝혀낼 수 없었다. 당연히 ‘과거시험 음모사건’은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이색은 1353년 원나라가 설치한 정동행성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기황후 아들의 태자 책봉식에 참석)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원나라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한다. 이는 과거시험 음모사건이 날조된 것임을 실력으로 확인해 준 것이다. 
이제현은 인재선별의 안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는 신흥사대부 출신으로서 권문세족, 부원배들과는 별다른 정치적 이해가 없었기에 과거시험을 소신 있게 주관할 수 있었다. 이는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고려군, 원나라 강소성(江蘇省)을 지켜주다

14세기 중반 이후 원나라 상황은 그야말로 난세지경이었다. 
원나라는 놀라운 속도로 제국을 성장시켰지만 몰락도 빨랐다. 자연재해와 재정궁핍에 의한 민생경제의 파탄, 정권 내부의 권력투쟁에 의한 사분오열,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의한 말기적 증상이 확대되어 폭발 임계점에 이른 원 제국은 멸망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절강성의 방국진(方國珍)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백련교도 유복통(劉福通)이 안휘성의 영주(穎州)에서 봉기했으며, 뒤이어 주원장(朱元璋)이 홍건군에 투신하여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처럼 몇 년 사이에 황하에서 양자강 유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원나라 타도의 기치를 내건 반란군에게 속속 제압되어 가고 있었다. 1353년 장사성(張士誠)이 소금 밀매업으로 확보한 부를 바탕으로 반란을 일으킨 뒤 강소성 고우(高郵)를 근거지로 나라를 세웠다. 나라 이름을 주(周)로 하고 스스로 성왕(誠王)이라 일컬었다. 고우성은 대운하 수송의 중심지로 강남의 쌀과 소금이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운송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원나라에서도 결코 내버려둘 수 없는 지역이었다. 
채하중(蔡河中)은 심양왕 왕고를 고려왕에 추대하려고 한 간신이다.
그는 충숙왕에 대한 무고장을 원 조정에 바치는 등 흉모(凶謀)를 그치지 않았는데, 다시 정승 자리에 복귀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장사성 토벌의 건이 일어났다. 
채하중은 기다렸다는 듯이 원 재상 탈탈(脫脫)에게 ‘자발적인 파병안’을 제안했다. 
장사성군의 토벌을 위해 고려에서 원군을 끌어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려에는 유탁과 염제신이라는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유능한 정승이 있습니다. 두 사람을 불러다가 장수로 임명하면 장사성의 난을 거뜬히 진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갑오년(1354년, 공민왕3) 6월 계묘일. 원나라에서 온 사신 일행은 고려 조정에서 안내해 준 접반숙소(接伴宿所)에 든 다음 공민왕을 알현했다.
“신, 원 황제의 명을 받아 고려국의 사행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 천자의 국서가 있습니다.”
공민왕은 원의 사신이 바친 두루마리로 된 국서를 개봉했다.
원 제국과 고려 두 나라가 우호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근래에 들어 중원 각처에 내란이 발생하고 있는데, 황하 중부지방에서 일어난 장사성은 한실(漢室) 부흥이란 기치를 들고 연경을 위협하며 요서까지 손에 넣고 있다. 이에 천자인 내가 친히 한적(漢賊) 장사성을 토벌하기 위해 남정(南征)하니 고려왕은 혈맹의 의를 생각하여 수군 3백과 효용군(驍勇軍)을 모병하여 8월 10일까지 연경에 파견해 돕기 바란다. 
공민왕은 국서를 읽고 난 후 살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당장 원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 그것이 문제였다. 공민왕은 원의 사신들을 물러가 있게 한 후,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주재했다. 
맨 먼저 찬성사 유탁(柳濯)이 말했다.
“전하, 정월에는 내부(內部, 왕실의 재정이나 물품을 담당)가 고갈되어 백관에게 인승(人勝, 신하들에게 주던 선물)을 중지한 사실을 잊으셨사옵니까? 우리의 재정도 어려운데 다 쓰러져가는 원나라를 위해 고려의 장졸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뒤이어 변정도감 이연종이 말했다.
“소신의 우견(愚見)으로는 다소 고려군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파병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옵니다.”
공민왕은 언짢은 듯 두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파병을 찬성하는 연유가 무엇이오.”
이연종은 신념에 찬 목소리로 꿋꿋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 등극하신 지도 어언 햇수로 4년 되었사옵니다. 빈사 직전의 고려가 전하의 선정(善政)에 힘입어 다시 활력을 찾아가고 있사옵니다. 전하의 노심초사(勞心焦思)를 하늘도 감복하여 매년 풍년을 내려 주었고, 군사들도 조련을 거듭하여 강군으로 거듭나고 있사옵니다. 그동안 고려가 원나라의 우산 아래 부마국으로 있으면서 왜구와 싸운 일 말고는 전쟁다운 전쟁을 치러 본 경험이 없사옵니다. 이 기회에 실전 경험을 쌓아 다가올 국난에 대비해야 하옵니다.”
그제야 공민왕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좌부대언 김속명(金續命)이 말했다.
“전하, 변정도감의 주장은 무모하옵니다. 지금 우리의 적은 해안을 침탈하는 왜구이지 한실 부흥을 꾀하고 있는 홍건적이나 장사성 무리가 아니옵니다. 또한 전비 일체를 고려가 부담한다는 것은 엄청난 국력낭비가 될 것이옵니다. 차라리 군량미 몇천 석을 보내 주는 것이 낫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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