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안 강행 처리에 성공한 한나라당이 큰일(?)을 해낸 승리감에 도취됐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예산항목들을 자세히 들어다보니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였다. 꼭 챙겼어야 할 예산이 빠지거나 줄어든 반면에 거물급 실세 국회의원들의 지역구 예산은 증액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내년도 사찰프로그램 지원예산을 올해 수준의 185억원 이상 책정을 약속해놓고 통과된 예산은 오히려 60여억원이나 줄어든 122억 5천만원이어서 정부여당이 불교계와 했던 약속도 깨졌다. 당장 불교계가 거세게 반발해서 앞으로 정부관계자와 한나라당 의원들의 사찰 출입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의 4대강 사업을 종단 차원에서 반대한다는 방침도 정했다.

야당 정서가 강한 강원도 민심을 얻기 위해 약속했던 춘천-속초 간 동서고속화철도사업비 30억원은 아예 예산안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런 가운데 정부의 최종 예산안 및 기금운영안에 당초 정부가 전혀 반영치 않은 사업을 위한 예산이 3300여억원이나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힘 있는 국회의원이 자신의 지역구 민원을 해결키 위해 국회 예산결산특위에 쪽지를 넣어 반영한 이른바 ‘쪽지예산’ 공방이 일어났다.

분석결과 최소 112개 신규 사업에 들어가는 1284억원 가량은 지역구 민원용 예산이었다. 여야가 육탄전으로 격렬하게 대치할 당시 일부의원은 자신의 민원사업 예산을 슬그머니 ‘끼워 넣기’해 챙겼다는 의혹을 피할 수 없는 대목이다. 특정 지역을 위한 예산도 상당액 포함돼있다. 이상득 이병석 의원이 관련된 포항-울릉 지역구에 1430억원이나 증액됐고, 예결위원장인 이주영 의원의 지역구(마산갑) 예산은 430억원이 늘어났다.

국회의장인 무소속 박희태 의원, 민주당 원내대표인 박지원 의원,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 등 몇몇 대표급 야당의원 지역구 예산도 증액됐다. 단상을 중심으로 육탄 공방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여야 실세 의원들은 ‘쪽지’를 주고받으며 실속을 챙겼다. 그래놓고 나라걱정이나 파행국회를 개탄하는 한숨소리는 땅이 꺼질 노릇이다.

민주당이 고흥길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사퇴를 놓고 예산 날치기 책임의 몸통을 숨긴 ‘꼬리 자르기’로 비판하며 예산안 단독처리 원천무효를 외치고 전국 순회 장외투쟁에 돌입해 있지만 국민 열기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 여당 하는 사람이고 야당 하는 사람이고 다 역겹다는 민심이다. 민주당이 가능하지 않은 4대강 사업비의 대폭 삭감만을 주장하며 예산심의에 한 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아 한나라당에 단독처리의 빌미를 줬다는 인식 역시 짙다.

뉴욕에 한식 식당 건설을 위해 배정된 50억원 예산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의 “한식 세계화는 좋지만 우리나라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뉴욕자본주의 시장 한복판에 국가가 운영하는 한식당을 세운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는 비난이 나오자마자 이 예산이 이른바 ‘김윤옥 예산’으로 빠른 전파를 탔다.

김윤옥 여사가 주도하는 ‘한식세계화’의 일환으로 예산이 배정됐고, 이 사업을 맡은 한식재단 이사장은 정운찬 전 농식품부 장관이다. 이 모두가 ‘우리 사는 나라’ 얘기들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