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당원 13명으로 샹하이에서 비밀리에 창당한 중국 공산당은 7월1일 9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1일 공산당 ‘창당 90주년 기념 대회’에서 “공산당의 창당으로 중국인은 민족독립, 인민해방의 빛나는 길을 걸으며 국가와 인민이 부유해지는 장엄하고 아르다운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은 공산당 창당으로 “인민해방의 빛나는 길” 대신 인민 억압의 길을 거쳐야 했고 “인민이 부유해지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여정” 대신 인민이 가난해져 굶어죽는 참담한 여정을 겪어야 했다.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이 1978년 자본주의 시장경제 방식을 도입한 이후에서야 비로서 “인민이 부유”해지기 시작하였다. 중국 공산당 90년은 피 묻은 손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멱을 딴 뒤 다시 그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는 악순환의 과정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부터 1949년 까지 무산계급 혁명의 깃발아래 수천만명의 생명을 짓밟고 자본주의체제 국민당 정권을 대만으로 몰아냈다. 이어 공산당은 자본주의 잔재를 말살한다는 기치아래 1958-62년 사이 “대약진(大躍進)운동”을 펼쳤다. 대약진 운동 기간 농민들은 농토를 빼앗기고 집단농장으로 내몰렸다. 농민들의 영농의욕 상실로 생산성이 떨어졌고 자연재해 까지 겹쳐 4500만명이 굶어죽었거나 반혁명분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대약진 운동이 끝나자 중국 공산당은 또 다시 중국을 1966~76년 사이 피바다로 물들였다. “문화대혁명”의 난동이 그것이었다. 소련 니키타 흐루시초프류의 수정주의 분자들을 일소하고 사회주의 혁명 열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문화혁명은 한 손에 마우쩌둥의 붉은 어록을 들고 다른 손엔 몽둥이를 휘두르며 날뛰는 젊은 “홍위병(紅衛兵)”에 의해 주도되었다. “주자파(走資派), “반혁명분자”, “간첩” 등의 혐의로 50만명이 타살되었다. 공산당 총서기를 지낸 덩샤오핑도 주자파로 몰려 노동자로 쫓겨났다.

홍위병의 난동은 마오쩌둥(毛澤東)이 병사함으로써 종식되었다. 덩샤오핑이 마오 추종자들을 제거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중국은 경제발전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밥 먹었나”의 곤궁에서 벗어나 “잘 쉬었나”의 풍요 시대로 접어들었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의 자본주의 체제를 파멸키 위해 수천만명을 희생시켰고 공산혁명의 급진화를 위해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강행하며 또 다시 수천만명을 굶겨죽이며 살륙했다. 공산당 폭력혁명이 없었더라면 중국인들은 지금 자본주의 국민당 지배하의 대만 만큼 부강해 질 수 있었으리라 본다.

2차대전 후 대만은 물론 한국, 일본, 독일 등 자본주의체제를 채택한 국가들이 모두 부자 나라로 성장하였음을 상기할 때 그렇다. 공산독재하에 묶여있는 북한에서는 아직도 수백만명이 굶어 죽었고 잔혹한 탄압속에 신음하고 있다.

러시아에서도 공산당 지배는 74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가졌고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섬으로써 마르크스-레닌-스탈린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베트남 공산당도 수백만명을 살육했으며 끝내 실패하고 자본주의로 되돌아 왔다. 캄보디아도 공산혁명을 위해 200만명을 “킬링 필드”에서 학살하였지만 붕괴되고 자본주의로 회귀했다.

공산주의 폭력혁명은 착각과 권력욕으로 시작되어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저지르고 아사자를 낸 뒤 다시 자본주의로 되돌아왔다. 공산당은 존재적 가치를 상실한 채 자본주의에 매달려 권력을 연명해 가고 있다. 공산당은 단지 일당독재 통치기구로만 존재한다. 중국 공산당 폭력혁명은 중국 5000년 역사에 끼어들지 말았어야 했던 대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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