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이처럼 조정회의는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파병파와 파병반대파로 나눠진 조정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갑론을박(甲論乙駁)만 계속할 뿐이었다. 아침에 시작된 회의가 땅거미 질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마침내 밀직제학 안보(安輔)가 지루한 조정회의에 종지부를 찍는 말을 했다.

“전하, 파병은 고려의 국운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옵니다.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서 급하게 결정지을 사안이 아니라 익재 대감 같은 경륜 있는 원훈(元勳)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신중하게 결정하시는 게 좋을 줄 아옵니다.”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든 중신들의 시선이 안보의 얼굴로 향했다. 한동안 고민하고 있던 공민왕은 한 줄기 빛을 찾은 듯 오른손으로 어탁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좋소. 오늘 조정회의는 이것으로 파하고 내일 다시 재론할 것이요.”

경륜과 혜안으로 원나라 파병문제를 해결하다

이제현은 그날 저녁 공민왕의 부름을 받았다. 

지공거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한동안 초야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던 그였기에 왕의 부름은 새삼스러웠다. 침전에는 수라간에서 마련한 정성스런 어주상이 나왔다. 공민왕과 이제현은 어주상을 마주보며 앉았다. 

먼저 왕이 말문을 열었다. 

“시중,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전하,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힘입어 영일(寧日, 평화스러운 날)을 보내고 있사옵니다.”

“오늘 시중을 대궐로 들어오시게 한 것은 원나라 파병 문제 때문입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어떻게 꺼 나가야 할지, 눈앞이 막막하고 가슴이 답답합니다. 시중께서 파병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혜안을 내 주시기 바랍니다.”

“전하, 전하께서 하문하시니 소신의 우견(愚見)을 말씀드리겠사옵니다. 무엇보다 국가의 위난 앞에 신민이 똘똘 뭉쳐 하나 됨을 보여줘야 합니다. 파병에 대한 반대 의견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사료되나, 소신은 파병 요구에 응하는 것이 고려의 국익을 위해 낫다고 생각하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지요.”

“먼저 우리의 국력이 파병을 할 정도로 신장되었다는 점이옵니다. 그리고 쇠퇴일로에 있는 원나라의 허실을 파악하고, 많은 젊은 장수들이 실전 경험을 쌓아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자세를 기르는 것도 필요하다고 사료되옵니다. 우장(雨裝)이라는 것은 비가 오기 전에 장만해 둬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단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사옵니다.”

“그 전제조건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2천의 군대를 파병하는 대신 군비는 원나라에서 모두 책임지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대원칙이옵니다.”

“원나라가 그것을 들어주겠습니까?”

“원나라는 지금 고립무원의 궁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찬 밥 더운 밥 가릴 형편이 아니라고 생각하옵니다.” 

“과인은 시중의 의견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마침내 이제현의 안이 조정의 의사결정으로 채택되었다. 명분과 실리를 함께 얻을 수 있는 ‘조건부 파병안’이 대세를 결정지은 것이다. 이처럼 이제현은 국가의 주요 현안을 처리하는 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그는 탁월한 경륜과 끈기 있는 집착력으로 실타래처럼 꼬인 외교 난제를 한 올 한 올 풀어내어 고려 조정의 어려움을 타개해 나갔다.

1354년(공민왕3) 7월. 

조정은 홀치(忽赤, 왕실의 숙위를 담당하는 군사) 순군(巡軍, 도둑을 잡고 난을 막을 목적으로 설치한 군대) 중에서 1,700명, 서경의 패수(대동강) 수군 300명, 도합 2천 명을 선발, 이름하여 고려종정군(高麗從征軍)으로 파병하기로 했다. 그리고 원나라가 지명한 고흥부원군 유탁, 우정승 염제신, 대호군(大護軍 : 대장군, 종3품) 최영, 권겸, 원호, 나영걸, 인당 등 40여 명의 장수들을 선발했다. 

공민왕은 출정하기 전에 최영을 따로 편전으로 불렀다. 이는 인재를 키우려는 이제현의 건의를 공민왕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당연히 이제현이 배석하고 있었다. 최영이 편전에 당도해서 부복하며 아뢰었다.

“전하, 찾으셨사옵니까.”

“최 장군, 따로 당부할 말이 있어 보자 했소.”

“전하, 하명을 주시옵소서.”

“최 장군은 과인이 원나라 연경에 있을 때부터 과인에게 신념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었으며, 언제나 ‘고구려의 옛 영광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하였소. 그런 우국충정에 찬 최장군의 말을 들으면 과인은 힘이 불끈 생기곤 했소.”

“전하, 황공하옵니다.”

“과인은 고려가 언젠가는 북벌을 단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따라서 이번 출정 기회에 요동, 요서 지방의 지형과 형세를 잘 살펴보고 한족이 다시 흥기하는 기운과 주원장, 진우량, 장사성의 역학관계를 면밀히 살펴주기 바라오.” 

“만 백성의 어버이신 전하의 깊은 뜻을 받자와 소장은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 신명을 다 바치겠사옵니다.”

공민왕은 용상에서 일어나 최영의 손을 잡고 무운을 빌었다. 

이제현은 최영과 함께 어전을 물러나오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 장군, 이번의 고려종정군은 고려 최초의 중국대륙 파병이네. 이 기회에 원나라 군의 지휘체계와 허실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네. 나는 자네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네. 전하가 자네에게 별도로 당부한 과업들은 극도의 보안을 유지해서 차질 없이 수행해주기 바라네. 전하와 나, 그리고 자네만 아는 일이니까. 참, 원나라 총지휘관 탈탈은 나하고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이니 내 안부를 전해주게나. 최 장군, 파병의 소임을 마친 후 우리 집으로 한번 초대하겠네.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네.”

“시중 어른의 당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수행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럼, 소임을 마친 후 어른 댁으로 다시 찾아뵙겠사옵니다.”

다음 날 아침. 

고려의 지원병 2천 명은 영빈관에서 처처에 붉은 깃발을 숲처럼 빽빽하게 나부끼고 대오를 형성하고 있었다. 총지휘관 유탁은 공민왕 앞에 부복했다. 

“유탁을 파병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니 고려를 위해 신명을 다하라!”

공민왕은 부복한 유탁에게 임무를 당부하고 고려국의 보검인 대장검을 하사했다. 대장검의 자루에는 고려 왕실 문장(紋章)인 봉황이 황금빛으로 영롱하게 새겨져 있었다.

“삼가 목숨을 바쳐 파병의 소명을 다하겠나이다!”

유탁은 두 손을 머리 높이 들어 대장검을 받았다. 

“출격!”

유탁의 명이 떨어졌다.

“존명(尊命)!”

장수들이 일제히 대답하고 물러났다. 

유탁은 위풍당당하게 마상에 앉아 대장군기(大將軍旗)를 나부끼고 앞에 선 기수(旗手)를 앞세우고 지원병들을 인솔하여 원나라 연경으로 출정했다.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리고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공민왕은 친히 열병(閱兵)하고 그들을 전송했다. 고려 최고의 정예부대들이 원나라로 출정하자 궁궐의 호위가 허술하게 되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공민왕은 궁수들을 모집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총지휘관 유탁은 눈빛이 형형하고 기골이 장대했다. 일찍이 전라도 만호로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입신을 하였으며 무용이 출중하고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탔다. 염제신(簾悌臣)은 본래 무신도 아닌데 채하중의 원한 때문에 끌려가게 된 셈이었다. 이들이 총지휘관으로 지목된 것은 이들을 전장으로 내보내야 채하중이 앉을 수 있는 정승 자리가 비워지기 때문이었다. 채하중은 자신의 계책이 마침내 적중하자 오매불망 그리던 정승 자리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총지휘관은 원나라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태사(太師) 탈탈(脫脫)이었다. 탈탈은 이제현이 14년 전(1340년) 충혜왕의 방면을 위해 원나라에 갔을 때 도움을 준 승상이다. 이 전투에는 고려군만 참전한 것이 아니라 토번(土蕃, 티벳지방, 파미르고원 지역)과 회회(回回 : 감숙성, 영하성, 내몽고, 청해성, 신강성, 중앙아시아)에서도 원군을 보내왔다. 이들의 목표는 당연히 장사성이 진치고 있는 고우성이었다. 

9월에 드디어 연합군의 출정이 이루어졌고, 11월 초에 첫 전투가 벌어졌다. 성 밖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장사성군은 대패하여 고우성으로 물러났다. 무려 27회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으나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탈탈은 병사를 나누어 고우성의 서남쪽에 있는 육합성(六合城)을 치게 했으며, 동시에 고려의 출전군사들과 연경에 있던 고려 사람 등 합계 2만 3천여 명을 선봉에 세워 고우성을 공략했다. 

유탁이 지휘를 하고 최영이 독전하여 성은 마침내 한 곳이 무너졌다. 그러나 고려군에게 성을 함락시키는 영광을 안겨주길 꺼려한 원나라 장수 달단이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이를 빼앗자”라고 말하며 군사를 퇴각시켰다. 하룻밤의 시간을 줬기 때문에 그날 밤 적이 성벽을 수축하고 단단히 준비하였으므로 이튿날 다시 공격하였으나 고우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장수가 개인 영달에 취하여 전쟁을 그르치고 만 것이다.

세 번째로 우정승에 오르다

1354년(공민왕3) 12월 갑인일. 

이제현은 68세에 세 번째로 우정승에 올랐다. 그는 늘 그러했던 것처럼 ‘늙고 능력이 부족해서 중임을 맡을 수 없다’며 다시 사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채하중이 영도첨의사사로, 홍언박이 좌정승으로, 강인백(姜仁伯)이 판삼사사로, 최천택(崔天澤)이 찬성사에 제수되었다. 

마침내 공민왕은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고려의 정예부대들이 원나라로 출정하자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고 자신의 외척세력들을 대거 등용했다. 외사촌형 홍언박과 또 다른 외척인 군부판서 경복흥, 감찰집의 김원명, 좌부대언 김속명 형제가 그들이다. 

한편, 원나라 과거에 급제한 이색은 원의 관직을 받았으나 뜻한 바가 있어 고려로 귀국하여 단번에 5품관에 해당하는 전리정랑(典理正郞) 겸 예문검교(藝文檢校)를 제수받았다. 

해가 바뀌어 1355년(공민왕4) 정월 경오일. 

장사성의 난을 진압하는 와중에 연경에서 탈탈을 참소하는 사건이 일어나 탈탈은 회안(淮安)으로 유배되어 독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는 기황후 일파의 음모로 인한 것이며, 탈탈이 실각되자 뒤를 이어 기황후 세력이 원 조정에 부각되기 시작한다. 

장사성은 총사령관의 경질로 원나라군의 사기가 떨어진 것을 알고 맹공으로 나와 원나라군을 무찔렀다. 원나라군은 패배했으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군사를 불러 모아 반란군 토벌에 나선 고려군은 회안로(淮安路) 수비에 동원되어 팔리장(八里庄)에서 여러 차례 적군과 싸웠다. 고려군이 회안성(淮安城)을 지키고 있을 때, 장사성 군이 사주(泗州)와 화주(和州)의 군사를 동원하여 회안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홍건적 8천여 명이 성을 포위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왔다. 

최영은 적토마를 타고 선두에 나와 적들과 맞서 싸웠다. 적토마는 온몸이 타는 듯한 붉은 털로 뒤덮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최영이 적토마를 타고 하늘로 치솟을 듯한 기상으로 달릴 때는 마치 불길이 흐르는 듯이 보여서 적들은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분분히 뒤로 물러섰다. 

“차앗!”

최영은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홍건적들의 급소를 노리면서 맹렬하게 창을 찔러갔다. 홍건적들은 최영과 부딪치자 처절한 비명 소리를 지르며 나뒹굴었다. 적들의 팔과 몸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공격하라! 놈들을 한 놈도 살려서 돌려보내면 안 된다!”

최영은 이를 악물고 병사들을 다그쳤다. 그의 장창이 번쩍일 때마다 홍건적들의 목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팔다리가 베어져 나갔다. 

“퇴각하라!”

 

※알려드립니다. 본지에 연재된 삼불망은 1316호부터 온라인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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