黨·靑, 민족 감정 앞세운 ‘정치마케팅’으로 野 압박

[일요서울 | 이도영 기자] 일본이 한국에 대한 반도체 핵심 소재의 수출 규제를 강화하기로 한 데 대해 국내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일본은 이번 수출 규제를 징용 문제에 대한 보복조치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국내에서는 정치 문제를 경제 문제로 연결한 아베 정부의 행동에 대해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하는 등 반일 감정이 확산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등 일본에 대한 강경 입장을 내고 야당은 국민 여론을 의식해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런 발언들이 도가 지나쳐 반일 정서를 활용한 정치마케팅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뉴시스]

-집권여당, 日 수출규제 대응 문제에 ‘추경’ 끼워 넣기... 黃 “국회사안” 선 그어

지난 1일 일본 정부는 반도체 제조에 중요한 소재 3가지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내렸다. 이는 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지만 일본은 이를 부정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지난 2일 한국에 대한 반도체 핵심 소재의 수출규제를 강화하기로 한 데에 “수출 관리를 적절히 실시하는 관점에서 운용을 재검토하는 것으로 대항조치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이) G20 정상회의까지 (강제징용 판결에 대해) 만족하는 해법을 제시하지 않아 신뢰관계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고 말해 이번 수출규제가 강제징용 배상판결의 이유임을 인정했다. 게다가 앞서 일본 정부는 한일청구권협정을 들며 우리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제3국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청했다.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르면 협정의 해석·이행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1차로 양국 간 외교적 경로로 해결하고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경우 중재위 구성과 제3국이 참여하는 중재위 구성을 통한 해결 등을 단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 16일 정례 브리핑에서 “(한국정부에) 협정상 의무인 중재에 응하도록 강력히 요청해 갈 것”이라며 “그 입장에 변함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3국 중재위에 대해 청와대 입장은 수용 불가능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이랬다저랬다 일본의 ‘말 바꾸기’

일본은 이와 동시에 이번 수출규제 이유로 ‘해당 품목이 한국을 거쳐 북한에서 화학무기 개발에 이용되는 등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지난 5일 후지뉴스네트워크스(FNN) 보도에 따르면 아베 총리의 최측근인 하기우다 고이치 자민당 간사장 대행은 전날 BS후지방송의 뉴스 프로그램에서 “(한국으로 수출된 화학물질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사안이 발견됐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여당 간부는 “특정 시기에 에칭가스에 대한 대량 발주가 이뤄졌는데, 이후 한국 측 기업에서 행방이 묘연해졌다”며 “에칭가스는 독가스나 화학무기 생산에 사용될 수 있다. 행선지는 북한이다”라고 말했다. 이 간부는 이번에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한 3개 품목은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들로, 북한에 전달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이와 같은 주장과 함께 자국민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사린가스’를 언급하며 수출규제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일본 공영 방송인 NHK는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인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반도체의 원재료 등 수출규제를 엄격화한 배경에는 한국 측의 무역관리의 체제가 불충분해 이대로라면 화학무기 등으로도 전용될 가능성이 있는 물자가 한국에서 다른 국가로 흘러 들어갈 리스크를 배제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이어 “수출규제 대상이 된 소재는 화학무기인 사린가스 등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지만 일부 한국 기업이 발주처인 인본 기업에 서둘러 납품하도록 재촉하는 것이 상시화되고 있다”며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물자가 한국에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타국으로 전달될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어 수출규제 조치를 단행하게 됐다”고 전했다.

사린가스는 맹독성 신경가스로 지난 1995년 일본 내 유사 종교단체인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에 살포해 13명이 숨지고 63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바 있다. 당시 도쿄 시민들이 무차별 테러를 당해 일본열도가 충격에 휩싸였다. 이에 사린가스는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에게 공포와 트라우마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자국민들에게 합리화시키기 위해 분노와 트라우마를 유발시키는 사린가스 카드를 꺼내며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文, ‘이순신’ 언급에 조국, ‘죽창가’로 화답

일본이 자신들의 대(對) 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정당화하며 억지 주장을 펼쳐가자 문재인 대통령은 강대 강으로 맞설 것을 시사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전국경제투어 일정으로 전라남도 무안을 찾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언급하며 “전남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며 호국정신을 강조했다. 이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경제와 기업이 어렵겠지만 힘든 상황을 함께 이겨내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5일 일본이 수출규제 근거로 북한 전달 등의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해 “제재의 틀 안에서 남북 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는 우리 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일본이 이번에 전례 없이 과거사 문제를 경제 문제와 연계시킨 건 양국 관계 발전에 역행하는 대단히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이번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는 상호 의존과 상호 공생으로 반세기간 축적해 온 한일 경제 협력의 틀을 깨는 것”이라며 “우리 기업들이 일시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우리는 과거 여러 차례 전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했듯이 이번에도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라고 강조하며 ‘이순신 발언’의 뜻을 이어갔다.

문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강경입장을 이어가는 중에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화답하며 ‘결속’ 메시지를 보냈다. 조 수석은 지난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SBS 드라마 ‘녹두꽃’ 마지막 회를 보는데 한참 잊고 있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나왔다”며 유튜브에 올라온 ‘죽창가’를 링크했다.

드라마 ‘녹두꽃’과 ‘죽창가’는 지난 1894년 ‘반외세·반봉건’을 주장하며 투쟁에 나선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조 수석은 지난 19일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가 아니라 ‘애국’이냐 ‘이적’이냐다”라고 적었다.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도 “우리는 국채보상운동으로 (위기를) 극복한 민족의 우수함이 있다”며 “이제 우리가 똘똘 뭉쳐 부품·소재와 관련해 이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전했다.

野, 정부 비판 목소리 국민여론에 주춤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과 조 수석의 발언이 국민의 반일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이순신 장군을 언급한 문 대통령을 향해 “정부의 일본 통상보복 대응 방안에서 좀처럼 국익을 읽어내기 어렵다”며 “국익 대신 선동과 자극이 읽혀져 착잡하고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조 수석의 죽창가 기사를 올리면서 “어쩌란 말이냐. 정부가 반성하고 조속히 해야 할 일을 마련하고 위기관리 대응할 생각은 안하고 정부가 국민을 선동해 죽창 들고 뭘 어쩌란 거냐”며 비판했다.

조원씨앤아이의 한 연구원은 일요서울에 “한일관계는 특수하기 때문에 모든 접근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정치계에는 ‘참모는 말이 없다’는 가장 큰 원칙이자 불문율이란 것이 존재한다. 비서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조 수석의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전했다.

국민들은 일본의 수출규제가 정치 문제를 경제로 보복한 아베 정권의 억지라며 반일 감정이 역대 최고조로 높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나며 일부 중소마트 상인들은 일본제품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한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일본제 학용품 등을 버리기까지 했다. 일본 제품과 대체 상품 정보를 제공하는 ‘노노재팬’ 사이트까지 개설되고 일본여행 정보 사이트인 ‘네일동’은 임시 휴면에 들어갔다.

이에 정치권에서도 국민 여론과 함께하며 지지율 높이기에 나섰고 야당은 국민 여론을 의식해 일본에 대한 강경 입장을 내는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11일 최재성 의원을 위원장으로 한 일본경제보복대책특위를 출범해 일본의 수출규제가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 지원 대책 등을 논의 중이다. 또한 지난 17일에는 명칭을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로 ‘보복’을 ‘침략’으로 바꾸며 대(對)일 강경기조를 강화했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일본 수출규제 철회 촉구 결의안 통과가 불발된 데 대해 한국당을 향해 “한국당이 일본 소속 정당이거나 일본 국민들로 이뤄진 당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다”며 “한국당이 지금까지 친일파와 친일 세력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 여지없이 나타났다”고 비판했다.

조원씨앤아이의 연구원은 “최저임금, 미중무역전쟁 등의 여파로 이미 한국 경제가 큰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일본의 경제보복조치는 쉽게 볼 사안이 아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여야가 합심하는 것이 아닌 지지율 높이기 위한 경쟁구도를 보인다면 패착을 불러올 것이다”고 분석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대표는 일요서울과의 통화에서 “최근 일본 수출규제 확대는 예정된 수순”이라며 “이번 사태 대응을 감정적으로 반일 감정을 부추겨서 지지층 결집을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면 국익에 도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청와대의 제안에도 교섭단체 대표 회동과 단독회동을 요구하며 영수회담을 거부해 왔다. 하지만 국민들이 일본의 수출규제에 강경 입장을 취하는 청와대와 여당을 지지하고 협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야당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황 대표는 조건 없이 회담을 수용하겠다며 입장을 바꿨다.

지난 18일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 간 회동이 진행됐다. 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들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부당한 경제 보복’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초당적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문 대통령과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이 자리에서 일본 수출규제 문제를 논의하면서 추경처리도 요구했다. 이 대표는 청와대 회동 이후 “문 대통령과 저는 모두발언과 비공개 회의에서도 추경 처리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황 대표는 ‘국회 사안’이라며 더 이상 응답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엄 대표는 “(반일 감정을 활용한 정치마케팅은) 황 대표가 조건 없이 청와대 회동을 수용하는 등 효과를 보이고 있다”며 “청와대는 국정을 운영해야 하니 마냥 강대 강으로 갈 수 없다. 민주당은 싸우고 청와대는 해법을 찾아야한다. 국민 분노를 활용해 동력을 만들어 보려는 의도가 있지만 계속 그럴 수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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