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나이로 ‘90세’에 교배하다 심정지 쇼크사

메니피 [뉴시스]
메니피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지난 6월 13일 오전 9시경, 제주도 제주시에 위치한 한국마사회 렛츠런팜 제주에서 국내 최고 씨수말인 ‘메니피(Menifee)’가 폐사했다. 한국마사회에 따르면 메니피는 이날 한 차례 교배를 마친 뒤 어지럼 증상을 보이며 바닥에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사인은 노인성 심장질환에 의한 급성 심정지였다. 메니피의 나이 23세. 사람으로 치면 90대에 해당하는 고령이었다. 한국마사회 측은 메니피가 국내 경마에 기여한 공적을 기려 장례식과 추모식 등을 진행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일각에서는 고령의 메니피에게 교배를 지속적으로 시켜 사망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연 평균 교배횟수 136회 달해
“교배로 수익 창출 안 해” 반박

메니피는 경주마계의 ‘전설’로 꼽히는 ‘시크리테리엇’의 고손자(高孫子) 말로 품종은 더레브렛이다. 1996년 미국에서 태어난 메니피는 1998년부터 약 2년간 경주마로 활동하다 2000년 씨수말로 전환됐다. 당시 명마 생산을 통한 국내 말 산업 발전을 노리던 마사회는 품종은 더러브렛으로 지난 2006년 마사회가 37억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미국에서 수입해 왔다. 메니피는 이후 2007년부터 올해까지 약 12년 간 무려 700두에 달하는 자마(子馬)를 배출했다. 자마들이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메니피는 한국 경마 역사상 최고의 씨수말로 등극했다. 자마들이 획득한 상금 누적액만 약 600억 원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자마는 ‘파워블레이드’로 파워블레이드는 한국 최초 통합 삼관마 달성이라는 위업과 함께 ‘그랑프리’ 우승 등의 기염을 토하며 ‘메니피’를 리딩 사이어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국내 말 산업계에 큰 족적을 남긴 메니피가 사망하자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는 한국마사회를 비판하고 나섰다. 페타는 지난 11일 “메니피의 심장마비를 방지할 수 있었나? 악화되는 심장질환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교배를 해야 했던 한국 최고의 씨수말”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페타는 성명에서 “페타 미국본부에서 농림축산식품부에 메니피의 죽음과 한국마사회의 말 교배 규정에 대한 조사를 서면으로 요청했다”며 “지난 10여 년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씨수말로 사랑 받던 메니피가 씨암말과 교배한 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어 “메니피는 치료가 필요한 심장질환 판명을 받은 이후에도 많게는 하루에 수차례 교배를 해야 했다”면서 “지난해 한국마사회는 그의 교배 횟수를 2017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시켜 4개월 내에 136회 교배를 해야 했다”고 비판했다. 페타에 따르면 메니피는 1일 2회 교배를 한 날이 32일에 달한다.

‘대동맥판’에 문제 발견됐지만…

페타는 또 올해 메니피의 대동맥판에 문제가 발견됐지만 한국마사회 측이 그동안의 연 평균 교배 횟수보다 많은 연 90회 교배 스케줄을 편성했다고도 지적했다. 페타 미국 본부 부의장 캐시 귀예르모는 “농림축산식품부는 메니피에 대한 추모의 일환으로 한국마사회 제주 목장이 메니피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한 것이 아닌지 조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어 “메니피가 씨수말로 활동할 수 있는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마사회는 과욕으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메니피는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일 수도 있는 교배 스케줄로 고난과 스트레스에 노출됐다. 이게 심장마비의 주 원인이 됐을 수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페타는 성명과 함께 미국 본부의 현장조사에서 녹화된 메니피의 교배 영상을 공개했다. 공개된 영상에서는 메니피가 암말과 교배를 시도하다가 여러 차례 뒤로 물러서는 장면이 나온다. 직원들이 몇 번이나 메니피를 끌어다 놓고서야 교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씨수말 6마리가 암말 470마리 상대하는 교배지원사업

한국마사회 소속 렛츠런파크 제주는 지난 2월 렛츠런팜 제주 교배장에서 2019년 교배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이번 사업에 투입된 씨수말은 총 6마리로, 몸값 합계가 200억 원에 달한다. 사망한 ‘메니피’도 이 사업에 참가했다. 상대하기로 예정된 암말은 총 470마리였다. 말의 교배기가 3월부터 6월 말까지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약 4달간 씨수말 한 마리가 암말 80여 마리를 상대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 번에 임신할 확률이 70%로 높지만 실패할 경우 재교배가 이뤄지기도 한다. 일반인들은 충분히 ‘혹사’라고 생각할 수 있는 횟수다. 특히 메니피처럼 고령의 질환자라면 더욱 조심해야 했다는 지적이다. 한 시민은 “90세에 성관계를 하면 사람도 목숨이 위험할 것으로 보인다”라며 “90세 노인에게 100여 회에 달하는 교배를 시킨 것은 동물학대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시민 역시 “워낙 비싼 씨수말이라 본전 빼려는 건 이해한다”라면서도 “(메니피가) 뼈속까지 이용만 당하다 죽는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경주마 도축 방관’ 의혹 샀던 마사회

경주마와 관련해 한국마사회가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한국마사회는 퇴역 경주마에 대한 도축을 방관한다는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에도 페타 조사관이 직원으로 위장 잠입해 이러한 실태를 9차례에 걸쳐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페타에 따르면 고급 혈통으로 대우받던 경주마 승자 예찬은 2018년 5월 8일 도축돼 1파운드(약 453g)당 17달러(약 1만 9900원)라는 헐값에 팔려나갔다. 도축 과정에서는 작업자들이 말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폭행하거나 몽둥이로 배를 찔러 강제로 도축장에 밀어 넣었다. 또 친구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말도 있다. 한국마사회는 “민간과의 협업으로 퇴역 경주마에 대한 순치·조련 시행 후 승용마로 전환해 경주마의 임의 처분(불법 도살 등) 사례를 최소화하겠다”며 “중장기적으로는 마주와 협의해 퇴역 후 활용방안 마련을 위한 복지증진 대책을 검토하겠다”는 대책을 내놨지만 논란은 여전하다.


물론 페타의 주장을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먼저 한국마사회가 수익 창출을 위해 교배를 시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한국마사회는 1회 800만 원에 달하는 메니피의 유상 교배료를 올해 무상으로 지원했다. 기업 이익이 아닌 농가들의 민원 해소를 위한 것이었다는 항변이 가능한 대목이다. 여기에 미국의 경우 인기 씨수말 한 마리의 연간 교배 횟수가 150회 안팎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미국과 비교하면 국내 교배 횟수는 많지 않다는 주장이다. 다만 말들이 처한 환경이 달라 이 주장으로는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다. 한국마사회는 메니피의 죽음, 페타의 성명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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