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가 건국 이래 최악으로 치닫는 형국이다. 위안부 문제로 촉발된 양국 간 마찰은 대법원의 일제 강점기 강제징병 배상 판결로 폭발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으로 정점을 치닫고 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친일파 및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반일 감정이 가장 강한 문 대통령 지지자들이 일제 패망 후 건국된 대한민국을 사실상 친일파의 나라로 몰아 이를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로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대놓고 프랑스가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나치에 부역한 사람들에게 행한 ‘과거사 청산’ 작업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는 1940년 나치독일에 점령당한 뒤 독일에 부역한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실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그마치 9000여 명을 총살 또는 교수형으로 처형했다. 또 35만 명을 조사해 이 중 12만 명을 재판에 회부한 뒤 총 9만8000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불과 4년 동안 독일에 부역한 죄로 처벌받은 프랑스인이 이 정도니 36년 간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에 부역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많겠는가. 아마도 공직에서 일한 사람들 모두가 친일파로 분류돼야 할 것이다. 아니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친일파가 돼야 할 것 같다. 이 친일파 리스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작업은 점차 형평성을 잃고 장기화되면서 프랑스 국민들이 피로감을 나타내고 청산 작업 주도 세력에 반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돌아선 민심은 과거사 청산을 고수한 정당에 참담한 선거 패배를 안겨줬다.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다.

일부 지자체가 벌이고 있는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은 더욱 가관이다.

수십 년 전통의 학교 교가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이 지었다고 갑자기 교체되는가 하면, 향나무가 일본산이라며 교목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 제품에 ‘전범 기업’이라는 딱지를 붙이려고 시도한 도의회도 있다.

이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동안 아무 불편 없이 사용해 왔던 일상용어에까지 친일 딱지를 붙이려 하고 있다. 경기도교육청이 ‘수학여행' ‘파이팅' 같은 일상용어를 일제 잔재 청산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다. 수학여행이 일제강점기에 우리 학생들을 일본에 견학시키던 행사에서 비롯됐고, ‘파이팅(Fighting)'이라는 응원 구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출진 구호로 ‘화이토(ファイト·fight의 일본식 발음)'라고 외치던 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훈화'는 상사가 부하에게 훈시한다는 일제 강점기의 군대 용어라 이 역시 청산돼야 할 일제 잔재라고 들이댄다.

이런 논리라면, 친일파가 작곡한 애국가와 동요 등도 부르지 못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한일관계가 이 지경까지 되는 데는 물론 일본에게 그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수많은 한국인들을 징용으로 끌어가고, 수많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잡아가고도 제대로 배상도 하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조차 하지 않으니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감정이 좋을 턱이 없다. 생존을 위한 것이었든, 그 이유야 어찌 됐건 유태인을 향해 끊임없이 사과하고 배상하는 2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과는 판이한 행보를 보이고 있으니 일본이 더욱 미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국익은 생각하지 않고 한일 마찰 문제를 무조건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않다.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무역과 연계해 보복하는 것은 치졸하기 짝이 없지만,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이와 비슷한 짓을 중국과 같은 경쟁국은 물론이고 우방국들에게도 수시로 하고 있는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현재의 이익도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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