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어디선가 홍건적들을 뒤로 물리는 명령이 떨어지자 적들은 일제히 물러섰다. 최영은 여러 차례 적의 창에 찔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맹수처럼 포효하며 용전분투(勇戰奮鬪)했다. 그리하여 적들을 모두 퇴각시킬 수 있었다. 회안성 전투에서 최영의 몸을 아끼지 않는 저돌성과 용맹은 적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27차에 걸친 반란군 토벌전에서 고려종정군은 이권(李權), 최원(崔源) 등 여섯 장수가 전사하였지만, 적의 대다수를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를 끝으로 고려군은 그해(1355년) 5월에 원나라에서 돌아왔다. 열을 지어 귀국하는 대규모 군마는 그 위풍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공민왕은 영빈관에서 고려 지원병 총지휘관 유탁, 대호군 최영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과 장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환영연을 개최했다. 

다음날 저녁. 정원의 후박나무 잎사귀를 요란하게 두들겨대던 빗줄기도 가늘어져 한낮의 더위가 식어갈 무렵이었다. 최영은 이제현의 수철동 집을 인사차 찾았다. 이제현은 최영을 정원의 느티나무 아래의 의자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원로요, 또 한 사람은 불혹(不惑)을 바라보는 연부역강한 장년의 망년지우(忘年之友, 나이에 거리끼지 않고 허물없이 사귄 벗)였다.

고희의 원로가 불혹의 장년에게 물었다.
“최장군, 파병의 임무를 대과없이 수행하고 국위를 선양한 것을 축하하네. 한족 부흥세력들의 역학관계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소주(蘇州)의 장사성은 천하를 도모하려는 큰 뜻은 없고 교역의 이득에만 부심하고 있사옵니다. 강주(江州)의 진우량은 군선과 병력이 강대하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인물은 곽자흥의 홍건군에 투신한 주원장이라는 인물이옵니다. 그는 사졸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투신한 그해에 군단의 참모까지 맡게 된 인물로 곽자흥 군단의 내분을 틈타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가고 있사옵니다.”
“최종적인 승자가 누가 되리라 생각하는가?”
“소장은 주원장이 원나라를 멸망시키는 주인공이 되리라 믿고 있사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주원장은 한 고조 유방처럼 평민 출신이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가슴과 원수도 끌어안는 포용력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잘 보았네. 나도 자네와 생각이 같네. 멀지않은 시기에 주원장, 진우량, 장사성이 천하를 삼분하여 패권을 다투겠지만, 그 중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쓰는 사람이 중원의 주인이 될 것이야.”
최영은 이제현의 예리한 직관력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개경에 앉아서 중국 대륙의 움직임을 마치 ‘천하가 내 손바닥 안에 있소이다’ 라고 읽고 있는 노 정승의 예지가 두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현이 다시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다행히도 공민왕이 즉위한 후 문풍(文風)이 진작되고 있으나, 멀지않은 시점에 원나라를 대신해서 한족 나라가 창업될 것이고, 다시 무신들이 조정의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가 도래할 걸세. 최장군은 그 시점에 조정의 원로로서 시대적인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야.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예. 어르신.”
“최장군, 나는 70평생 많은 사람을 보아 왔네. 자네는 문무겸전에다 기상도 출중하니 필시 귀하게 될 인물이야. 출장입상지상(出將入相之相)이니 아무리 보아도 시중 한 자리는 하게 될 걸세, 허허허.”
“과분한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한 고조 유방(劉邦)을 도와서 제업을 이룬 장량(張良)은 ‘지혜로운 사람은 천 번의 생각 중에서 한 번쯤은 실수할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천 번의 생각 중에서 한 번쯤은 얻을 만한 것이 있다’고 했네. 최장군은 매사에 자중자애하며 종사의 일을 순리에 따라 해나가기 바라네.”
“소장은 부족한 점을 더욱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어르신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겠사옵니다.”

이처럼 이제현은 고려 말에 전개될 시대적인 상황을 미리 내다보는 통찰력과 예지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도부장군으로 발탁했던 최영이 고려의 동량지목(棟樑之木, 대들보)이 될 것이라고 믿고, 큰 인물이 될 수 있도록 강하게 담금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조선의 황희(黃喜) 정승이 김종서(金宗瑞) 장군을 천거하여 ‘6진개척’이라는 찬란한 성과를 거둔 것도 이제현이 최영을 키운 것과 다르지 않다 하겠다.

기철의 역모사건 혁파, 한양천도 기도를 무산시키다 

원나라에 간 공녀들은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고려의 사대부 중에는 출세욕에 들떠서 자발적으로 원의 궁중으로 딸을 보낸 경우도 있어 그들 중에는 원나라 사회의 상층부에서 황제·황후 및 귀족들의 궁인 또는 시녀로서 상당한 활약을 한 사람도 있었다. 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가 되어 태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낳은 기황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대부분 노비로 전락해서 저자(시장)에서 매매되기도 하는 등 인간 이하의 삶을 영위했다.

공민왕은 숙위(宿衛)라는 명목 아래 원나라에 끌려가 10년 동안 머무르며 약소국의 왕자로서 온갖 수모를 겪었다. 그는 고려인의 불행한 처지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였기에 가슴속에는 반원 의식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이제현에 의해 반원정책에 대한 신념이 더욱 강해졌다. 반원정책은 곧 친원세력인 기씨 일파의 숙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철(奇轍)은 총부산랑을 지낸 기자오의 둘째 아들로서 누이동생 기황후의 후광으로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고려의 정승에 임명된 뒤, 대사도(大司徒, 정1품의 명예직)에 올랐다. 

공민왕은 조일신의 난 이후 표면적으로는 기씨 일족을 극진하게 대우했다. 당연히 기황후를 등에 업은 기철의 위세는 가히 절정에 달하여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부터 기철의 일족과 친당(親黨)들은 교만하고 포학해져서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또한 기철은 공민왕이 원나라로부터 공신 칭호를 받은 데 대한 축시를 지으면서 신칭(臣稱)을 하지 않는 무례를 범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기철은 자신의 세도를 지키기 위하여 친척과 일당을 요직에 앉혔으나,  나중에는 자신의 입지에 불안을 느껴 공민왕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른바 ‘기철의 역모사건’이다. 
기철은 원의 쌍성총관부 소속 군사를 동원하는 한편, 전 판삼사사(종1품) 권겸(權謙)과 전 좌정승(종1품) 노책(盧) 등의 친원세력들과 모의하여 정권을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반란계획은 사전에 적발되고 말았다. 반란모의에 가담했던 권겸의 부하 중 김창식이라는 자가 거사를 앞두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김창식은 반란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일족이 몰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발적으로 고변(告變)을 결심했다. 

그는 “기철이 쌍성의 불온한 무리들과 비밀히 연계하여 그들을 제 편으로 만들어 반역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라고 공민왕의 비밀조직에 밀고하였다. 반란계획은 지체 없이 공민왕에게 보고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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