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가르침에 ‘슬기로운 이는 유리해도 교만하지 않고 불리하다고 어리석고 비굴하게 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세상사 불리했던 상황이 바뀌어 유리해지면 마치 팔에 완장이라도 찬 듯이 오만방자하게 군다거나, 거꾸로 유리했던 상황이 변해 불리해지면 용기나 줏대 없이 남에게 굽히는 사람은 모두 어리석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판이 딱 이렇다. 9년 만에 다시 집권한 진보진영 여당 의원들은 야당생활 동안 무슨 서러움과 불이익을 그리도 당했는지 정권을 잡자마자 ‘집권 100년론’을 외쳐댔다. 현실적이지 않은 말이긴 하지만 다시는 정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100년 간 집권하기 위해서는 보수진영을 궤멸해야 한다고 소리 높였다. 이른바 ‘보수 궤멸론’이다.

섬뜩하지 않은가. 파괴해서 멸망에 이르게 한다는 뜻으로 아예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다는 무시무시한 막말이다. 집권을 했으면 통합을 외쳐도 시원찮은 판국에 이처럼 야당 때보다 더한 막말을 해대고 있으니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는 비판이 나오는 게다.

과거의 좋은 것을 계승하려는 것이 보수이고, 미래가 더 좋도록 개선하려는 것이 진보이기에 보수와 진보는 함께 굴러가야 할 두 바퀴가 아닌가. 이런 단순한 진리를 외면한 채 한 쪽 바퀴를 궤멸하면 어찌 되겠는가 말이다.

이들은 또 야당의 막말에 대해 ‘내로남불’식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야당 시절 대통령과 여당 인사들을 향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을 일삼았던 그들이다. 그랬던 사람들이 정작 입장이 바뀌어 여당이 되자 야당의 비판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권력을 잡았음에도 상대를 포용할 줄 아는 ‘가진 자의 여유’를 이들에게서 찾기란 연목구어(緣木求魚)처럼 보인다. 정치권력이 오만에 빠지면 국민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집권여당으로 권력을 누리다 졸지에 정권을 빼앗겨 야당이 돼버린 한국당은 야당의 개념조차 몰라 자기네들끼리 싸우며 내분을 일으켜  보수 진영이 실망과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이같이 여야 4당이 걸어놓은 교묘한 ‘막말 프레임’에 갇혀 한동안 논란에 휩싸여 곤욕을 치렀던 한국당이 거친 말을 하는 당원들에게 공천 시 감점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아 당 안팎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기까지 했다.

황교안 대표는 아예 “국민 마음에 상처를 주고, 국민 신뢰를 떨어뜨리는 언행이 나온다면 참으로 엄정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엄중 경고하는 상황까지 만들었다. 여권진영의 릴레이식 공격으로 상황이 좀 불리해 보이자 화들짝해서 막말 자제령을 내릴 정도면 한국당은 비굴하게 야당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진배없다는 비판이 일었다.

집권당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다소 거친 발언은 솔직히 야당만이 할 수 있는 사실상 ‘묵시적 특권’처럼 돼 온 터다. 그럼에도 한국당 지도부는 범여권의 막말 여론전에 백기를 드는 리더십의 한계를 보인 것이다.

한국당을 뺀 여야 4당과 언론의 ‘막말 프레임’에 지레 겁을 먹는 무능함도 그렇거니와, 막말이라기보다 쓴소리에 가까운 말 표현에 자중지란을 계속하는 비굴한 모습이 한탄스럽다 못해 측은지심을 일으킬 노릇이었다. 보수 제1야당이 이런 모양이니 앞으로 보수진영이 더 어떤 프레임에 갇혀 우왕좌왕케 될런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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