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경제보복 맞서 불매운동 장기화·체계화 조짐

[사진=황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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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지난해 11월, 대한민국 대법원은 미쓰비시 중공업(이하 미쓰비시)이 양금덕 할머니 등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5명에게 각 1억~1억5천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의 묵인 하에 미쓰비시가 조선인들을 군함도로 끌고 가 강제노역을 시킨 것에 대한 배상 판결이었다. 당시 미쓰비시는 약 500~800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로 징용해,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노역을 시켰다. 임금이 지급되기는 했으나 이 역시 각종 명목으로 떼어가 실제로 받은 급여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제노역 중 질병, 영양실조, 익사 등으로 숨진 조선인만 122명(20%)에 이르는 것을 보면 군함도가 왜 ‘지옥섬’으로 불렸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번 배상 판결은 상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미쓰비시 측은 반발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배상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만을 고수할 뿐 배상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단은 올해 1월과 2월, 6월 등 세 차례에 걸쳐 미쓰비시 쪽에 협의 요청을 하며 집행을 늦췄지만, 미쓰비시는 끝내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서울 중심부 일본 브랜드 매장 한산
매출 하락 눈에 띄어…유니클로 30% ↓
 

결국 피해자 측은 한국 내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강제매각 조치를 신청했다. 일본 본사 측이 협상에 응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일본 정부가 앞장서서 경제보복에 나섰다. 일본 정부는 지난 4일 대한민국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 주요 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에칭 가스 세 가지 품목에 대한 포괄적 수출 허가대상에서 제외했다. 에칭가스는 반도체 생산 공정에서 습식 식각과 세정 과정에서 꼭 필수한 핵심 소재다. 일본산 에칭가스는 순도가 99.999%에 달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굴지의 반도체 기업들이 수입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산 반도체 핵심 소재인 에칭 가스 등을 갑작스럽게 제외한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경제 보복 조치였다.

하지만 일본은 수출규제가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가 아닌 수출관리 체제 점검 차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전략물자 관리 우방국이었던 한국에 수출된 에칭가스가 북한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주장이다. 에창가스는 반도체 외에도 독가스 등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데 쓰인다. 앞서 하기우다 고이치 자민당 간사장 대행은 “한국에서 대량 발주해 수출한 에칭가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며 “에칭가스의 행선지가 북한일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쳤다. 지난 23일 교도통신 보도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과 경제산업성의 담당자 역시 자국에 주재하는 각국 대사관 직원을 대상으로 일제히 설명회를 열고 “조치는 적정한 수출관리의 재검토"라며 '징용공 소송'을 둘러싼 한일 대립은 관계없다고 주장했다”고 알려졌다.

치졸한 일본의 복수극…국민 분노↑

치졸한 일본의 복수극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이 시작됐다. 온라인을 통해 전파된 불매 운동의 공감대는 지난 10일을 전후로 급격하게 확산됐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 게재된 ‘NO, BOYCOTT JAPAN’이라는 로고는 일장기와 영어 단어 ‘NO’가 절묘하게 합쳐진 디자인으로 극찬 받으며 불매 운동의 상징이 됐다.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등의 문구 역시 불매 운동의 방법을 군더더기 없이 드러낸다는 평을 받았다. 여기에 더해 ‘노노재팬’이라는 사이트가 개설돼 국내에서 판매·유통되고 있는 일본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이 사이트 등을 이용해 일본 상품에 대한 정보를 얻고, 불매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타깃이 일본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다. 지난해 8월을 기준으로 국내에 입점한 유니클로 매장은 186곳에 달한다. 저렴한 가격 등으로 인기를 끌며 탄탄한 입지를 자랑하고 있다. 유니클로의 최고재무책임자(CFO) 오카자키 타케시가 “한국에서 불매운동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발언한 것도 한국에서의 성공 신화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난 한국 국민은 이 발언 직후 거센 비판을 쏟아냈다. 결국 유니클로 측은 “당시 전하고자 했던 바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고객님들께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뿐이며, 그러한 노력을 묵묵히 계속해 나가겠다는 취지였다"고 부랴부랴 해명했다.

사과에도 가라앉지 않은 ‘성난 민심’

유니클로는 첫 번째 사과 닷새 후인 지난 22일 다시 한 번 사과의 뜻을 전했다. 유니클로는 이날 “한국의 고객들께 심려를 끼쳐 드려 대단히 죄송하다”며 “저희의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분을 불쾌하게 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과가 한국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충분했을까. 기자는 24일 오후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한 유니클로 매장을 찾았다. 평일 낮이었던 것을 감안해도 매장은 한산했다. 3~4명의 중국인 관광객만이 옷을 둘러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평소 줄을 길게 늘어서던 피팅룸 역시 기다림 없이 바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직원의 “필요한 옷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라”는 외침만이 공허하게 매장을 떠돌았다.

일본 지분율이 99.6%에 달하는 신발 브랜드 멀티샵 ABC마트도 사정은 비슷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한 ABC마트 매장 1층에서는 중국과 베트남 관광객이 신발을 고르고 있었다. 2층에서 한국인 여성을 발견하고 “불매 운동이 한창이다. ABC마트가 일본 기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알고 있다. 구매하러 온 게 아니라 그냥 구경하러 온 것”이라며 매장을 빠져 나갔다. 3층 매장은 직원 두 명을 제외하면 아예 고객이 없었다. 반면 국산 스파 브랜드인 에잇세컨즈 매장은 고객들로 붐볐다. 에잇세컨즈에서 옷을 고르고 있던 대학생 홍수연(23·여)씨는 “평소에는 유니클로 매장에서 양말이나 옷 등을 많이 샀다”면서 “하지만 불매 운동이 이뤄지고 있는 시점에 일본 브랜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잇세컨즈는 국산 브랜드라고 해 여기서 옷을 고르는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매장 직원 A씨는 “불매 운동 기간에 따로 매출을 집계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면서도 “체감 상 손님이 조금 늘어난 것 같다”고 전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유니클로가 2017년 9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국내에서 올린 매출은 1조3732억 원, 영업이익은 2344억 원에 달한다. 매출액만 놓고 봐도 한국은 일본과 중국에 이은 세계 3위 시장이다. 그만큼 타격도 컸다. 이미 업계에서는 국내 유니클로 제품 판매량이 30%가량 감소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물론 이 같은 매출 감소가 유니클로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슈에무라와 시세이도 등 일본에서 제조하는 화장품 16개사의 평균 매출 역시 전주 대비 47%, 판매량은 36%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CU와 GS25 등 편의점에서의 일본 맥주 매출은 38.7~40.3%까지 급감했다. 일본에 대한 불매 운동이 생활 전반에 걸쳐 포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불매 운동이 언제까지 이어지느냐는 일본 정부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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