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찰총국 소속 40대 男, 스님으로 위장해 국내서 활동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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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간첩(間諜)이란 한 국가나 단체의 비밀이나 상황을 몰래 알아내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나 단체에 제공하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다. 양 쪽이 모여 단순히 힘 대 힘으로 승부를 내던 고대의 전쟁을 벗어난 뒤 간첩의 중요성은 점점 커졌다. 상대방의 정보를 많이 알아낼수록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우리나라를 묘사한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간자(間者)나 세작(細作) 등 간첩을 뜻하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의 손무(孫武)가 지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은 간첩을 향간, 내간, 반간, 사간, 생간이라는 다섯 가지 종류로 나눠 상세히 설명하고 있을 정도다. 향간은 해당 지역의 주민을 포섭해 만든 간첩을 뜻한다. 내간은 상대 정부의 관리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반간은 적의 간첩을 역이용하는 이중간첩이며, 사간은 배신이 의심되는 아군 간첩에게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흘리는 것이다. 생간은 직접 간첩을 보내는 방식이다. 생간의 경우 침투가 어렵고 자칫 의심을 받기 쉬워 고도의 훈련을 거친 정예를 투입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지난달 국내에서 검거하다 검거된 40대 남성이 바로 이 생간, ‘직파 간첩’이었다.

수년 전 활동하다 출국→국적 세탁 후 재입국
국정원, 공(功) 세우고도 ‘화해 무드’에 쉬쉬

지난 24일 공안당국 등에 따르면 최근 북한에서 직접 남파한 ‘직파 간첩’이 체포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지난달 남파 간첩 용의자 A씨(40대)를 모처에서 검거했다. 보안당국 조사 결과 그는 북한 정찰총국 소속인 것으로 의심된다. 북한 정찰총국은 대한민국을 포함한 해외 여러 지역에서 공작활동을 벌이는 정예 기관이다. 북한의 김영철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이 정찰총국장 출신이다. 공작원 양성과 침투, 요인암살, 테러, 납치, 정보수집 등 다양하고 위험한 임무를 폭넓게 수행한다.


A씨 역시 북한에서 특정한 지령을 받아 활동하던 중 우리 측 첩보망에 걸린 것으로 드러났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가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테러 관련은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그의 국내 입국·활동 시기는 지난해부터 올해 6월까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수년 전 대한민국을 오갔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과거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다 지난해 제3국으로 출국, 국적을 세탁한 뒤 재입국했다는 것이다. 직파 간첩의 국적 위장은 가장 흔한 수법 중 하나이기에 이 같은 의심은 합리적이다. 실제로 과거 검거된 직파 간첩들 역시 상당수가 국적을 위장해 대한민국에 침투했다. A씨 역시 이렇게 들어온 뒤 국내에서 스님 행세를 하며 활동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흔한 방식인 ‘탈북자’ 행세가 아닌 종교인으로 위장한 이유에도 궁금증이 일고 있지만 보안당국은 “검거 여부도 확인해주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과하게 신중한 보안당국…‘쉬쉬’ 의혹

보안당국 입장에서 직파 간첩 검거는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다. 그러나 보안당국은 공을 세우고도 내세우기는커녕 한 달이나 보안 유지에 신경을 쓰며 쉬쉬했다. 이를 두고 남북 대화국면에서 간첩 체포 사실을 성과로 밝히는 데 부담을 느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직파 간첩 체포는 잘 일어나지도 않는 일일뿐더러 공안 분야에서는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곧바로 공개하는 것이 상식에 가깝다. 이번처럼 언론 보도가 이뤄진 이후에도 사실 확인을 꺼리는 태도는 이례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보안당국 등이 남북 대화가 이뤄지는 상황 속에서 정치적 판단에 따라 간첩 체포 사실에 입을 닫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실제 A씨가 검거된 지난달 말은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시기와 맞물린다. 한미 정상회담 준비가 한창이었고, 회담 기간 중 남·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지며 협상 재개와 평화 분위기에 대한 기대감이 하늘을 찔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안당국이 자칫 평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는 직파 간첩 체포 사실을 공개하는 데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대로 보안당국이 A씨를 대북 정보원으로 역이용하려 체포사실을 비공개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보안당국은 이와 관련해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어 추측만 무성할 뿐, 속사정은 알 길이 없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간첩 35명 검거

국정원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검거한 간첩은 35명이다. 기타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 225명을 합치면 총 260명이 검거됐다. 연평균 검거 인원은 28.6명이다.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느냐”던 세간의 말과는 사뭇 다르다. 다만 현 정부 들어 국보법 위반 사범을 제외한 간첩의 검거 인원은 크게 줄었다. 2017년에는 단 한 명도 붙잡히지 않았고, 지난해에는 한 명이 체포된 것으로 전해졌다. 가장 최근 붙잡힌 직파 간첩은 2006년 7월 말 서울 한 호텔에서 체크아웃 중 체포된 정경학(당시 48세)씨다. 정씨는 미국계 태국인으로 신분을 위장해 국내에 잠입했다. 그는 김일성 종합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로 1990년대 후반 울진 원자력 발전소와 서울 용산 미군부대 등 주요 시설을 촬영, 북한에 전달하는 등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


정씨 체포 2년 후에는 위장 탈북 간첩 원정화(당시 34세)씨가 체포됐다. 2000년 중국동포 명의로 위장해 한국에 침투한 그는 군 장교 포섭을 위해 위장교제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귀순한 故 황장엽씨의 소재 파악 등이 임무였지만 실패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외에도 1997년에는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 간첩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95년 충남 부여에 출몰한 무장간첩 김동식이 대표적인 직파 간첩 사건으로 꼽힌다.

野 “원포인트 안보국회 열어야”

직파 간첩 체포 등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과 관련해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25일 “더 이상 그대로 우리가 안보 역주행을 방치할 수 없다”며 “다음 주에 원포인트 안보국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 대표는 “독도가 뚫리고 동해상이 뚫리고 직파간첩이 뚫리고 대한민국 안보에 구멍이 숭숭 났다”면서 “이유는 청와대 안보관의 싱크홀이 뚫려서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물론 나 대표의 발언을 ‘안보 공세’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적지 않은 국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북한의 공격적인 도발에 불안감을 나타내고 있다. 청와대의 안보 라인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할 때라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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