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륜선수협회장 임기 4년 간 예산의 25% 유흥비로 유용”

엄복동의 자전거 [사진=국민체육진흥공단]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촬영 당시 사용된 자전거 [사진=국민체육진흥공단]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일제강점기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가사의 이 노래는 당대의 영웅이었던 비행기 조종사 안창남과 자전거 선수 엄복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사람은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품고 살아가던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영웅들이었다. 특히 엄복동은 ‘동양의 자전거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빼어난 실력으로 각종 대회를 휩쓸며 민족의 자존심을 세웠다.

“선수 복지·처우 개선 등에 사용돼야 할 돈”
사업회 측은 ‘묵묵부답’ 일관

1892년 태어난 엄복동은 17세 때인 1909년 처음 자전거에 입문했다. 순식간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1910년부터 각종 대회에 참가, 입상하며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본격적인 선수 생활은 1913년 4월 열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를 통해 시작했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가 서울 용산 연병장에서 개최한 이 대회에는 무려 10만 명의 관객이 모여 뜨거운 관심을 보냈다. 엄복동은 이 대회에서 중고 자전거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조선인들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이후 엄복동은 각종 자전거 대회를 석권하며 전국에 위명을 떨쳤다.


그러자 일본은 우민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의 기를 꺾기 위해 엄복동을 음해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5월 2일 일본의 자전거 영웅 모리 다카히로까지 초청해 경성시민대운동회 자전거 경기가 열렸다. 하지만 일본의 계획과 다르게 엄복동은 다카히로에 완승을 거두자 일본은 갑자기 경기 중단을 선언했고, 분노한 엄복동은 우승기를 부러트려 버린 뒤 구타당했다. 이 사건은 민족의 자긍심과 저항 정신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평을 받는다.


이후 선수 생활을 이어가던 엄복동은 1949년 대한자전거경기연맹주최 제1회 전국 자전차 급종별 경기대회에서 노장 3000m 1위를 차지한 뒤 공식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1951년 한국전쟁 도중 북한의 폭격에 사망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엄복동의 경우 선수로 생활하던 1926년과 1950년 등 고가의 자전거를 훔쳐 팔다 붙잡혀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어 일각에서는 좀도둑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엄복동이 조선인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그를 단순히 좀도둑으로 폄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 최근 들어 국내에서는 ‘사이클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엄복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17일 엄복동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위기 맞은 엄복동기념사업회

2014년 11월 엄복동기념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엄복동기념사업회는 2018년 이름을 재단에서 사업회로 변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엄복동의 친손자인 엄재룡씨가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리고 약 1년 뒤인 2019년 2월 공석이었던 이사장 자리에 제6대 한국경륜선수협회장을 역임한 박현수씨를 추대하며 엄복동에 대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와 동상 건립등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엄복동기념사업회의 이 같은 계획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암초를 만났다. 박 이사장이 취임 5달여 만에 횡령과 배임 등의 혐의로 피소됐기 때문이다. 한국경륜선수협회 측은 지난 17일 박 이사장이 한국경륜선수협회 회장으로 재임할 당시 전 임직원 일부와 함께 유흥비 등으로 약 3억 원을 유용했다며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1998년 창립된 한국경륜선수협회는 현재 경륜선수 500여 명 등을 회원으로 둔 단체다. 경륜선수들의 복리 증진과 인권 개선을 위해 일종의 ‘노조’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고소장에 따르면 박 이사장은 지난 2015년부터 2019년 초까지 한국경륜선수협회 6대 회장으로 재임하며 1건에 500만 원 상당의 금액을 유흥비로 사용하는 등 총 220회 접대비를 협회 예산으로 지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700만 원 상당의 고급 의류와 500만 원 상당의 유명 브랜드 시계, 200만 원 상당의 양주 등을 포함해 총 79회에 걸쳐 ‘선물대’라는 항목으로 공금을 지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이사장 등이 지출한 공금은 접대비와 선물대 항목으로만 약 9000여 만 원에 달한다고 한다. 박 이사장이 여기에 더해 특활비와 보조비 등의 명목으로 약 2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유용한 혐의도 고소장에 포함됐다.


이날 한국경륜선수협회 측은 “박 이사장은 한국경륜선수협회 회장으로 재임 시 유흥비, 특활비 등 약 3억 원을 유용했다”면서 “선수들의 피, 땀 같은 회비로 운영되는 선수협회의 자금을 출처가 명확하지 않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큰 지출을 했다는 것에 선수들은 분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번 고소를 통해 발원본색 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4년 예산 약 12억 원 중 3억 원 유용?

이와 관련해 한국경륜선수협회 관계자는 일요서울에 “엄복동기념사업회와 사단법인 한국경륜선수협회와는 행정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는 조직”이라면서도 “전 회장인 박현수가 이사장으로 추대되고 경륜선수 은퇴자 일부가 엄복동기념사업회에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두 단체 사이에 인사이동이 있었음을 귀띔했다. 그는 이어 “박 이사장의 후임으로 선출된 7대 회장 및 집행부는 인수인계 과정에서 6대 집행부의 자금 집행 및 흐름이 이상한 것을 포착하고 여러 방면으로 확인 작업을 했다”며 “그 결과 선수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협회의 자금이 무분별하게 남용됐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경륜선수협회에 모이는 회비는 연간 약 3억 원 수준이다. 회장의 임기 4년 동안 약 12억 원이 모였다고 가정하면 박 이사장이 유용한 3억 원은 1년 치 회비이자, 임기 전체 예산의 25%에 달하는 돈이다.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기에 7대 집행부는 6대 집행부를 상대로 법적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관계자는 “유용된 돈은 선수 복지나 처우 개선 등 다양한 항목으로 사용해야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기자는 엄복동기념사업회 측에 이번 사안에 대한 입장을 물었지만 사업회 측에서는 어떤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다만 사업회 측은 투데이코리아에 “경륜선수협회에서 어떤 근거로 고소장을 제출한지는 모르겠지만 곧 입장문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주일 여가 흐른 지금도 사업회 홈페이지에서는 어떤 입장문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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