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공민왕은 며칠을 전전반측(輾轉反側)했다. 기황후가 뒤에 버티고 있는 기철 일당을 주살하는 것은 큰 모험이지만 기철을 주살하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즉통이라. 원나라가 쇠퇴하고 있는 국제정세의 변동은 고려의 국권회복을 위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로 다가왔다. 결국 대대적인 반원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기철 일당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356년(공민왕5) 3월 초하룻날.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함께 명덕태후를 모시고 승려 보우(普愚)의 설법을 듣기 위해 봉은사로 갔다. 당시 보우 스님은 1346년 원에 유학하여 명승 석옥화상(石屋和尙)의 의발(衣鉢,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가사와 바리때)을 전수받은 고승으로 원과 고려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승려였다.
보우 스님은 이렇게 설법했다.
“제왕의 길은 교화를 밝게 하는 데 있는 것이옵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부처를 성실히 모신다 하더라도 무슨 공덕이 있겠사옵니까?”
공민왕은 사제(師弟)의 예를 다해 국사의 설법에 답했다. 
“예, 국사의 가르침을 따라 국정을 잘 돌보겠습니다.”
봉은사에서 돌아오는 공민왕의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기철 일파를 제거하는 거사를 벌이기 위한 결심이 굳게 선 것이었다. 

그해 3월 중순. 공민왕은 먼저 원의 쌍성총관부의 천호 이자춘(李子春, 이성계의 아버지)을 내조(來朝)하게 해서 소부윤(小府尹)을 제수했다. 그리고 기철 일당을 제거하기 위한 회유(사전 정비작업)를 했다.
“이공, 그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몸은 비록 밖(원나라)에 있었지만 마음은 우리 왕실에 있었으므로 충선왕께서도 총애하시고 가상히 여기셨소. 이공은 동북면의 무지한 백성을 안정시키기에 얼마나 수고가 많소?”
“소장, 주어진 임무에 충실할 뿐이옵니다.”
“과인은 이공의 큰 꿈을 성취시켜 줄 생각이오. 그대는 돌아가서 쌍성의 유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다스려주시오. 만약 사변이 있으면 과인의 명령에 따라주시오.”
“예. 전하의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그해 5월 초. 
공민왕은 동북면의 후환을 미연에 방지한 후, 마침내 기철을 향해 칼을 빼들고 선수를 쳤다. 그는 주연(酒宴)을 베푼다는 핑계로 홍의를 시켜 재추(宰樞)들을 궁궐로 초청했다. 당연히 기철, 권겸, 노책도 함께 불러들였다. 
정세운(鄭世雲)은 공민왕으로부터 ‘부원배들을 척결하라’는 어명을 받고 강중경(姜仲卿) 등 무장한 갑사(甲士)들을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기철과 권겸이 먼저 입궐하고 나머지는 아직 입궐하지 않았다.
경천흥(慶天興)은 이 같은 상황을 비밀리에 공민왕에 아뢰었다.
“두 사람은 이미 입궐하였으나 노책 부자가 아직 오지 않았사옵니다. 만일 거사가 누설되기라도 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옵니다. 빨리 계획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잘 알았네.”
공민왕은 즉시 정세운(鄭世雲)에게 밀명을 하달했다. 
“노책 부자가 입궐하지 않았지만, 먼저 거사를 단행하라!”
그리하여 기철의 목은 공민왕이 보는 앞에서 정세운의 칼에 달아났다. 권겸은 기철의 죽음을 보고 달아났으나 강중경이 권겸을 뒤쫓아가 궁문에서 참살했다. 이들이 흘린 핏자국이 궁궐에 낭자하였다. 노책은 연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급파된 군사들에 의해 자신의 집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기철의 역모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철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들 기평장은 원나라로 도망하여 기황후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이후 기평장은 원나라의 벼슬을 얻어 동녕부로 와서 고려의 북변을 침탈하고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절치부심(切齒腐心)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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