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처남의 역모 가담으로 우정승을 사직하다

한편, 역모사건의 종범인 전 판삼사사 권겸은 이제현의 손아래 처남이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원 황태자의 궁녀로 바쳐 태부감태감(太府監太監)이 된 부원배로서 일신의 부귀영화만 누리길 좋아하였다. 이제현은 조정의 평판이 좋지 않은 권겸과는 소원하게 지내고 있는 사이였다. 그러나 권겸이 기철과 공모하여 난을 일으켜 주살되자 이제현은 망연자실하였다. 처남의 가문이 멸문의 화를 당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제현은 문득 10년 전에 작고하신 장인 권부가 한 유언이 생각났다.

‘나는 ‘당대 9봉군’이라는 명예로운 가문을 이끌었지만, 아들 중 하나로 인해 필경 집안이 화를 입을 지도 모르겠네. 내가 죽고 난 후 집안을 잘 부탁하네…….’ 

장인 권부의 다섯 아들 중 막내아들이 바로 권겸이었다. 이제현은 장인의 예측력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나 역적의 매부가 우정승의 대임을 계속 맡을 수는 없는 법. 이제현은 6개월 전에 제수 받은 우정승의 자리를 미련 없이 사직하고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제현은 좌정승 홍언박, 군부판서 경천흥, 감찰집의 김원명 등 정권 실세들에게 “권겸은 실패한 역모사건의 종범에 불과하니 처가 권씨 가문이 멸문의 화만은 면할 수 있게 선처해 주게”라고 부탁하였고, 정권 실세들은 이제현이 조정에 기여한 공을 배려하여 이를 수용하였다.

1356년(공민왕5) 5월 말. 
공민왕은 기철 일파를 숙청한 후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조정을 일신했다. 홍언박(洪彦博)을 우정승으로, 윤환(尹桓)을 좌정승으로, 원호(元顥)를 판삼사사로, 허백·황석기를 찬성사로, 전보문과 한가귀를 삼사우사와 삼사좌사로, 김일봉·김용·인당을 첨의평리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마침내 조정의 전열이 정비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급변하는 대륙의 정세를 이용하여 원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주독립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과감한 정치혁신과 북벌정책을 의미했다. 
먼저, 초기에는 일본 원정을 위한 전방사령부로 설치되었다가 그것이 단념되면서 고려 내정을 간섭하기 위한 기관으로 군림하던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철폐했다. 이는 강력한 주권회복 정책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다음은, 밀직부사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로,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을 부사로 삼아 원나라가 100년 전(1258년)에 함경도 화주(和州,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탈환하도록 하였다. 본래 이들 지역은 고려 정부의 통치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고 고려의 유이민(流移民)과 여진족들이 섞여 살던 곳이었다. 
공민왕은 병마판관 정신계(丁臣桂)를 이자춘에게 보내 내응(內應)할 것을 종용했다. 이자춘 일가는 대표적인 부원세력 중 하나였지만, 공민왕의 북방영토 회복 운동에 전격 가담하면서 친 고려 세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자춘은 고려에 가담해 쌍성총관부 함락에 큰 공을 세우면서 부원세력이란 꼬리표를 떼게 된다. 이후 이자춘은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이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시켰고, 이것이 그의 아들인 이성계가 뒷날 조선왕조를 개창할 수 있는 세력기반이 된다. 

그해 6월. 
공민왕은 첨의평리 인당(印)을 서북면병마사로, 최영을 부사로 임명하여 압록강 서쪽 8참(站)을 공략하게 하여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단동) 등 3참을 빼앗아 교통의 요지를 장악하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이는 고려 최초의 요동정벌이었다. 
서북면은 고종 5년(1218) 몽골이 살례탑(撒禮塔)을 보내 고려를 침공할 때 인주(麟州, 의주 인근)의 지역사령관인 도령(都令) 홍대순(洪大純)이 반역함으로써 원나라에 복속되었던 땅이었다.
원나라의 순제는 공민왕의 북벌에  크게 노하여 고려의 사신 김구년(金龜年)을 요양행성의 감옥에 가두게 하고 “80만 대군을 동원해 고려를 응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는 고려의 실지회복을 원나라에 대한 침략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고려와 원의 충돌은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원나라와 정면 대결을 강행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공민왕은 고육지책(苦肉之策)을 썼다. 그해 7월에 인당에게 국경 침범의 죄를 뒤집어 씌워 그를 참수형에 처하고, 인당의 수급을 원나라 연경에 보내 순제의 분노를 달랬다. 
그때 원나라에 올린 표문은 《고려사》에 이렇게 전한다.

‘관리와 군인들이 압록강을 건너 군사행동을 한 것은 사실 고려왕의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그 죄인을 고려의 국법에 의해 처단하였으니 하늘과 땅같이 넓고 인자한 마음으로 황제 폐하의 노여움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이 4천리 땅은 미력이나마 영원히 황제 폐하의 울타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원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죄를 뉘우쳐 진정(陳情)하므로 관용을 보여 지난 허물을 용서한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이는 원나라가 양자강 이남지역에서 일어난 홍건적들의 봉기 때문에 대규모 정벌군을 보낼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고려는 완전한 자주 독립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의 인당 장군을 원나라와의 화해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은 조처는 공민왕의 정치적 술수에서 나온 것으로, 전공(戰功)을 세운 장수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다뤄서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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