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백성을 위해 한양천도를 저지하다

한양은 고려 중엽 때부터 개경과 평양에 버금가는 도시로 각광을 받았다. 
한양은 개경(개성),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함께 4경의 하나로 ‘남경(南京)’이라 불리었다. 이후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개성지기쇠퇴설’과 함께 ‘남경천도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고려의 수도 개경은 도선(道詵) 국사가 천년 도읍지로 정한 명당이었는데 도선은  ‘고려 왕조는 500년으로 끝나고 반드시 한양에 새로운 왕조가 세워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면서도 한양이 개경의 지기(地氣)를 훔쳐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삼각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장명등을 설치하여 불을 밝히고, 쇠로 만든 열두 마리의 개를 세워 삼각산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엽 이후 고려의 국운이 점차 쇠미해지고 왕권은 약화되고 권신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자 군신들 사이에서는 ‘개경보다 지덕이 왕성한 길지(吉地)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천도론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공민왕이었으나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었다. 왕위에 오른 지도 벌써 6년이 지났건만 공민왕의 심기는 어둡고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시해하려 했던 모반이 벌써 두 번이나 있었다. 이름하여 ‘조일신의 난’과 ‘기철의 역모사건’이 그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반란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공민왕은 악몽에 시달리는 날이 많았다. 

“왕기, 네 이놈! 지하에서도 네 놈을 저주할 것이다!”
“은혜를 저버린 놈, 네가 제 명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더냐!”  
“죄 없는 나를 죽였으니, 네 놈도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원귀(寃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발버둥치는 조일신, 기철, 인당 장군의 원혼이 공민왕의 꿈자리를 어지럽혔다. 깨어나 있는 것도 다시 잠드는 것도 무서웠다. 공민왕은 미궁을 헤매고 있었다. 밤마다 계속되는 악몽을 신하들과 상의할 수도 없었다. 원귀들은 공민왕의 멱살을 잡아서 흔들었다. 머리가 기둥에 박혀 흘린 피가 공민왕의 침전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그 때마다 공민왕은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나곤 하였다. 노국공주도 심신이 지친 공민왕을 위로하진 못했다.

공민왕은 자신의 업보를 해소하기 위해 1356년 4월에 보우(普愚) 스님을 왕사(王師)로 책봉하여 광명사(廣明寺)에 머무르게 했다. 보우 왕사만이 공민왕의 심중을 헤아리며 안식처 노릇을 할 수 있었다. 

1357년(공민왕6) 2월. 
보우 왕사는 ‘도참설(圖讖說)’을 공민왕에게 건의했다.
“전하, 주나라 문왕은 빈곡에서 이민족의 침입을 피해 기산으로 옮겨 왕업을 크게 이루었사옵니다. 백제의 성왕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도성을 옮겨 나라의 중흥을 이루었사옵니다. 도성을 옮겨서 인심을 일변하고 심기일전하옵소서.” 
“왕사, 나라가 소란스러운 이때 남쪽으로 왕궁을 옮기는 것은 열성조의 뜻에 반하는 것이 아니겠소.”
“전하께서 지금 도성을 옮기신다면 하늘이 전하를 크게 도울 것이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보우 왕사는 나직이 아미타불을 염송하고 나서 말문을 열었다.
“감결(鑑訣)에 이르기를, 한양(남경)에 천도하면 해외 36국이 내조(來朝)하여 조공해 온다고 하였사옵니다.”
“지난날 목종, 신종, 강종 임금님도 한때는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계획하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보우 왕사는 한양 천도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선대의 여러 임금들이 평양으로 천도를 계획했으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그곳의 기운이 이미 쇠하였기 때문이옵니다. 지난 인종 임금 때에는 묘청, 정지상, 백수한 등이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경천도를 고집했으며, 결국 반란이 일어나 애매한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사옵니다. 그러나 이번의 한양천도는 상황이 다르옵니다. 어느 땅이든지 때를 만나야 발복할 수 있는데, 한양 땅의 기운은 비를 만난  용이 승천하고 숲을 만난 범이 포효하듯 복이 일어날 시기이옵니다.”

공민왕은 보우 왕사의 신념에 찬 열변에 취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젠 꿈속에서 만나는 조일신, 기철, 인당의 원귀도 무섭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자신이 왜 한양 천도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그래, 한양이로세! 한양은 도읍지로서 손색없는 길지가 아니던가. 산이면 산, 강이면 강, 과거 삼국이 한수(漢水)를 차지하기 위해 공방을 벌였던 기회의 땅이 아니던가.’
공민왕은 다시 힘 있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고맙소, 보우 왕사. 과인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어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마침내 공민왕은 조회에서 천명했다.
“과인은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했으니, 경들도 만반의 준비를 해주시오. 익재 시중이 천도대승(遷都大丞)의 대임을 맡아 한양에 궁궐터를 보고 궁궐을 축조하는 천도작업을 주관하도록 하시오.”
“예,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이제현은 공민왕의 어명을 차마 그 자리에서 거부할 수 없었다. 심약해진 주상의 심기를 살피는 것이 신하된 도리였기 때문이다.  

첨의찬성사 윤택(尹澤). 그는 이제현 보다 두 살 아래이나, 이제현이 지공거로 뽑은 문생으로 충숙왕으로부터 “아들 왕기(나중의 공민왕)의 뒷일을 부탁한다”는 고명(顧命)을 받은 인물이다. 충숙왕이 타계하자 윤택은 이승로와 함께 원의 중서성에 글을 올려 강릉대군 왕기를 왕으로 밀었으나 실패했고, 충정왕이 즉위하자 광양감무로 좌천되어 공민왕이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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