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우키시마호 폭발 사건’의 진실

우키시마호 폭발 사건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시민들 [사진=뉴시스]
우키시마호 폭발 사건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시민들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로 시작된 일본의 경제보복에 분노한 우리 국민들은 유니클로, ABC마트 등 일본 브랜드에 대한 불매 운동으로 대응하고 있다. 정부 역시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등 한일 양국의 경제가 전면전으로 치닫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는 개봉 이후 박스오피스 1위를 놓치지 않으며 25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다음달 일본이 저지른 또 하나의 만행을 담은 김진홍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키시마호’가 개봉한다. ‘결코 침몰하지 말아야 할 진실, 참혹한 역사에 대한 진실규명이 시작된다’는 슬로건 아래 제작된 ‘우키시마호’는 광복 직후 벌어진 ‘우키시마호 폭발 사건’을 담고 있다. 아픈 역사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잊힌 ‘우키시마호 폭발 사건’은 과연 무엇일까.

광복 맞아 부산으로 돌아가던 조선인 7000여 명 참극

70여 년 흐른 지금도 일본 정부는 ‘미국 탓’ 되풀이

지난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한 일본 정부는 강제 징용한 한국인 노동자들이 전범 재판 과정에서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일본 정부는 해군을 통해 예하부대에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한국인 노동자들을 부산으로 송환하라”는 극비 지시를 내렸다. 애초 우키시마 호에게 내려진 명령은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일부 승조원들이 새롭게 내려진 명령에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상부의 명령은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광복 6일 뒤인 1945년 8월 21일 약 7000여 명의 조선인을 태운 우키시마호는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했다. 수많은 조선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을 안고 배에 올랐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8월 24일 우키시마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뱃머리를 돌려 일본 중부 연안 마이즈루 항에 입항했다. 당시 일본 연안에는 미군이 설치한 기뢰(공 모양의 관 속에 폭약·발화 장치를 갖추고 수중에 부설해 배를 폭파하는 장치)가 널려 있었다. 마이즈루 항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우키시마호가 항구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며 배가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강제 징용돼 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 수천 명이 귀향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사망했다.

갑자기 왜 폭발했나? 엇갈리는 침몰 원인

일본은 사건 당시부터 원인이 미군 측에 있다고 주장했다.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배가 접촉하며 폭발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폭발을 일으킨 원인이 자기기뢰가 아닌 음향기뢰여서 우키시마호 탐지기에 걸리지 않았다고 일본 측은 설명했다. 배에서 발생하는 자기(磁氣)에 반응해 폭발하는 자기기뢰와 달리 음향기뢰는 배의 엔진 소리 등에 반응해 일정 거리가 되면 자동으로 터진다. 음향기뢰를 피하기 위해서는 소해정이 음향 발신기로 기뢰의 위치를 파악, 안전한 길을 안내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 측은 우키시마호가 갑작스러운 항로 변경 명령을 받은 탓에 소해정들의 에스코트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마이즈루항 입항 이유에 대해서는 “배의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일본 측은 기뢰 폭발 사고라는 주장의 근거로 우키시마호의 상태를 꼽았다. 상부가 아닌 하부 구조물에만 폭발 흔적이 있고, 선체에 폭발로 생긴 구멍이 없다는 점 등이 일본이 제시한 근거다. 여기에 일본은 “미군은 이 사건을 수중에 부설한 기뢰에 의한 전과로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 한국은 우키시마호 폭발이 일본 해군의 계획범죄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키시마호 승조원들이 배가 부산에 도착하면 분노한 조선인들에게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했고, 우키시마호에 폭탄을 설치한 뒤 폭파시켰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폭설’이다. 실제 탑승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본 해군은 “우키시마호를 타지 않으면 배급을 받을 수 없다”거나 “이 배가 조선으로 가는 마지막 기회다”라는 식으로 탑승을 독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탑승자들을 갑판으로 유도했다는 일본 측의 주장과는 달리 일본 해군이 조선인들을 갑자기 배 밑으로 내려가라고 지시했다는 생존자 채길영 씨의 증언도 있다. 채 씨는 “승조원들은 우키시마호에 비치돼 있던 소함을 타고 빠져나갔다”며 “그 뒤에 배가 폭발했다”고 기억했다. 또 다른 생존자 강이순씨 역시 “배에 타고 있던 일본 해군들이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면서 “배가 폭발하기 직전에는 일본 해군들이 기관실로 몰려갔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이외 생존자들도 “폭발음이 3~4회 들렸다”고 입을 모은다.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폭발음이 여러 차례 들리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또 기뢰 폭발 시 나타나는 물기둥도 없었다고 생존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1954년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배의 선체가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점도 자폭설의 근거다. 폭발이 외부에서 벌어진 것이라면 선체는 안쪽으로 구부러져야 하는데, 우키시마호의 선체는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바깥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출항부터 수습까지…이해할 수 없는 일본의 태도

우키시마호를 둘러싼 의문점은 기뢰냐 자폭이냐를 제외해도 줄을 잇는다. 먼저 항로에 대한 부분이다. 우키시마호가 출항한 오미나토 항은 일본 북부에 위치해 있다. 상식적으로 가장 빠르게 부산으로 향하는 길은 동해를 횡단하는 항로다. 하지만 우키시마호는 일본 열도의 연안을 따라 내려갔다. 앞서 지적했듯 당시 일본 연안에는 수많은 기뢰가 부설돼 있었다. 우쿠시마호가 정말 기뢰를 피할 생각이 있었는지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사망자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일본은 “우키시마호에 타고 있던 한국인 송환자는 3,725명, 해군 장병은 255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한국인 524명과 승조원 25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이 승선 명부를 작성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 발표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우키시마호에 탑승했던 한국인은 약 7000~7500명에 달했다. 일본 정부의 발표와 2배 가까이 차이 나는 숫자다. 사망자 역시 최소 1000명, 많게는 5000명에 달한다는 증언이 나왔다.

일본 정부는 이처럼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한 우키시마호 폭발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 사건 진상조사 요구를 묵살하는 것은 물론, 인양된 선체를 전혀 조사하지 않고 민간기업에 팔아 넘기기도 했다. 우키시마호 사망자의 유골이라며 반환한 300여 구의 유골은 여러 사람의 뼈가 뒤섞인 가짜로 밝혀지며 논란을 일으켰다.

광복의 기쁨을 누린 지 70년이 훌쩍 넘었지만, 우키시마호 사건 유가족의 아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늘 그렇듯 잘못된 역사를 왜곡하고 숨기려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이 지금처럼 자신들의 추악한 역사를 계속 덮으려고만 한다면, 주변국들의 신뢰를 얻을 길을 요원하다.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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