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치 역사상 정치 9단으로 불린 정치인은 3명 있었다. 김영삼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대중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종필 전 국무총리로 우리나라 현대 정치에서 한 세대, 즉 30년 동안의 ‘3김 시대’를 풍미(風靡)했던 주인공들이다. 지난 10년 동안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차례로 고인이 되면서 그들의 시대도 끝났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치에서 현존하는 정치 9단은 사라지게 되었다.

혹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선거의 여왕이라 칭송하면서 정치 9단 운운하기도 했지만, 그의 정치력이 최순실에게 조종당했던 꼭두각시 정치력에 불과했음이 밝혀짐으로써 전혀 설득력을 얻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정치인 중에 정치 9단에 가장 근접한 정치인은 누구일까? 그러한 정치 9단을 찾기 전에 우선 정치 9단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위의 3명의 정치 9단의 정치인으로서의 특징이기도 하다. 우선 정치 9단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정치를 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 국민을 위한 일이라는 확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치 권력을 갖겠다는 강한 의지는 기본적 소양에 속한다.

때로는 사자의 굳건함도 필요하고, 때로는 무모한 듯 보이지만 사자에게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하이에나의 처절함도 필요하다. 때로는 여우의 간교함으로 승부를 하고, 때로는 멧돼지 같은 저돌적인 돌파도 필요하다. 때로는 악어의 먹이가 됨으로써 종족을 보전하는 누와 같은 희생도 필요하고, 그 누를 먹어치움으로써 종족을 보전하는 악어와 같은 포악함도 필요하다.

정치 9단은 신의 한 수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반전의 매력을 갖춰야 하고, 한 방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치명타를 장착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운치도 있어야 한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라이벌의 존재는 정치 9단의 완성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정치에서 이러한 정치 9단의 요건을 갖추어서 실제 정치 9단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정치인으로 여겨져 온 사람은 박지원 의원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박지원 의원을 정치 9단으로 격상시켜 부른 적이 있지만, 그에게는 3김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보스의 품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아직 정치 9단이 아니다.

박지원 의원이 곤경에 처해 있다. 국민의당에서 시작한 20대 국회의원 생활이었지만, 바른정당과의 통합에 반대하여 민주평화당을 창당했으며, 엊그제 정동영 대표와 결별하여 새로운 신당운동에 나서게 됐다.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은 한계점에 다다른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5선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고 있다.

언어적 유희로 ‘비아냥 정치’의 9단이 된 손혜원 의원은 박지원 의원의 탈당을 두고, 자신의 SNS에 “80세, 4선의원의 꿈을 이루려 하시나 본데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호남 분들이 그 뻔한 전략에 이번에도 속을까요?”라고 적었다. 뒤늦게 손혜원 의원은 “박 의원이 3선 의원인 줄 알았는데 자그마치 4선 의원이었다. 죄송하다. 선수 깎아서”라며 곪은 상처를 덧나게 했다. 박지원 의원에게 최대의 모욕을 선사한 것이다.

박지원 의원은 14대에 국회에서 민주당의 비례대표 21번을 받아 간신히 국회에 처음으로 입성했다. 그 후 15대 낙선, 16대 17대를 정부와 청와대에서 일했고, 18대 선거에서는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19대에서는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되었지만, 20대는 국민의당에서 모험을 걸었다. 이제 그의 새로운 모험이 시작된다. 그가 2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면 누가 뭐래도 정치 9단으로의 등극이다. 대통령도 할 수 있는 위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정치 9단을 필요로 하는 시대로 회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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