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유승민 의원을 입에 올린 것은 뜬금없었다. “유승민 의원과 통합 안 하면 자유한국당의 미래는 없다”는 발언은 용기 있는 주장이다. 유승민만 동의한다면 당을 통째로 갖다 바치겠다는 결의가 충만했다. 정치적 오해 사기 딱 좋다. 어떤 정치인도 다른 의원에게 러브콜을 하며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기가 속한 정당의 미래를 걸지는 않는다.

나경원은 친박의 지원을 받아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친박은 황교안 대표까지 만들면서 당을 장악했다. 탄핵 이후 뒷전에 물러났던 친박세력은 다시 당의 전면에 등장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친박 세력은 유승민을 ‘배신자’라고 욕하고 ‘탄핵의 원흉’이라고 저주한다. 도저히 당을 같이 할 수 없는 사이라 할 것이다.

나경원에게 유승민이 필요하다. 당 지지도는 20% 밑으로 떨어졌고, 패스트트랙 강공의 후과로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일본의 반도체, 첨단소재 부품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반일 정서가 치솟는 와중에 친일 프레임에 당과 자신이 제대로 걸렸다. 이대로 간다면 총선에서도 패배할 것이 뻔하다. 무엇인가 국면 전환이 필요했다.

나경원과 유승민이 이회창을 통해 정치에 나선 사람들이다. 나경원이 원내대표가 되기 위해 친박의 손을 잡기 전에는 나경원과 유승민은 보수정당 내에서도 개혁성을 가진 축에 속했다. 친박의 손을 잡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오른손으로 친박을 잡고, 왼손으로 유승민을 잡을 수는 없다.

당내 세력 분포로 봤을 때 자유한국당은 바른미래당의 유승민그룹보다는 홍문종, 조원진의 우리공화당그룹과 통합할 가능성이 높다. 유승민과 통합하겠다는 것은 친박세력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신호탄이다. 광화문의 태극기 세력과 척을 지는 선택이다. 나경원이 지금까지 보여준 당내 리더십을 감안하면 이런 과감한 선택을 할 것으로 예상하긴 어려웠다.

나경원이 유승민 카드를 던진 이유는 따로 있을 수 있다.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정계개편은 황교안 대표가 주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수정계개편이 우리공화당을 포함한 태극기세력만을 대상으로 해서는 크게 파급력을 갖기 어렵다. 유승민을 비롯한 보수진영의 중도개혁그룹을 끌어안아야 다음 총선에서 기세를 올릴 수 있다.

황교안은 친박을 업고 당대표에 올랐지만 박근혜 중심의 친박세력과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 황교안 주변의 친박은 관료 출신, 초재선 그룹이고 이들은 친박 중심 보수정당 재편이 아닌 황교안을 중심으로 한 중도보수 중심 정계개편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유승민의 바른미래당 그룹과 안철수 전 대표 세력까지 끌어안으려 할 것이다.

유승민은 한때 보수개혁진영의 등대와 같던 입장에서 많이 초라해졌다. 유승민은 바른미래당이 보여주는 당권을 둘러싼 막장극에서 하루 빨리 탈출해야 하는 처지이다. 자유한국당이 중원에서 태극기세력이 있는 극우 쪽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나가는 상황에 텅 빈 중원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상처만 입고 있는 상황을 끝내야 한다.

지금 상황으로는 현 야권 보수세력이 총선에서 자멸할 가능성이 높다. 정계개편은 이 난국을 탈출하기 위한 상수에 가깝다. 문제는 누가 주도해서 어떤 얼굴들을 내세우느냐 하는 것이다. 나경원, 유승민, 안철수, 박근혜와 같은 얼굴들이 다시 전면에 나서는 것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새로운 얼굴들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작금처럼 황교안과 나경원이 ‘집토끼’를 잡는 데 혈안이 돼 있는 한 새로운 인사들이 들어오기 힘들다. 선거를 치르려면 ‘집토기’도 필요하지만 ‘산토끼’도 필요하다. 그나마 산토끼가 안철수다. 나경원은 ‘뜬금없는’ 유승민을 언급하기보다 안철수를 언급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내년 총선에서 득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중구난방에 오락가락인 야권 발 정계개편의 현주소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