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그날 저녁. 조회를 파한 후 이제현은 자신의 문생이기도 한 정당문학 이인복(李仁復)을 대동하고 단출하게 윤택의 집을 찾았다. 한양천도 계획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조정에서 윤택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국의 재상이 거동할 때에는 구종별배(驅從別陪)가 따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제현은 두세 명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 점이 이제현다운 점이어서, 이인복이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윤택은 스승 이제현과 이인복이 내방했다는 전언을 가솔(家率)로부터 접한 후 댓돌을 버선발로 내려서며 두 사람을 정중히 맞이했다.
“이 누옥(陋屋)에 시중 어른께서 어인 행보시옵니까. 아무 전언도 없이요?”
“내 찬성사 대감의 술 한 잔 얻어 마시자고 예까지 왔네.”
“어서 오르시지요.”

이제현과 이인복은 윤택의 뒤를 따라 그의 거처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묵향이 그윽하고 사군자 중 대나무 서화 한 폭이 벽에 걸려 있었다. 문득 ‘견의불위무용(見義不爲無勇)’이라 쓰인 《논어》의 한 구절이 시선에 들어왔다.
이제현은 족자에서 시선을 돌려 윤택을 향해 덕담을 건넸다.
“의는 사람이 행해야 할 일인데 이것을 보고도 행치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공자의 말씀은 강직하고 청렴한 율정(栗亭, 윤택의 호)의 성품과도 잘 어울리네 그려.
“과찬의 말씀이옵니다. 시중 어른.”
이제현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율정, 일찍이 도선 대사는 송악의 지세를 극찬하면서 이곳에서 삼한을 통일할 왕이 나오고, 이곳이 통일국가의 도읍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지. 지리적으로도 송악은 사방팔방으로 수로가 뚫려 있어 교통과 물자의 운송이 편리하여 한 나라의 도읍지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곳이네.” 
“송악은 태조 왕건 대왕의 5대조 강충이 이곳에 소나무를 많이 심은 까닭에 부소압에서 송악으로 이름을 고치게 되었지요.”
이어 이제현은 본론인 한양천도의 불가함을 윤택에게 말했다.
“율정, 태조께서 철원에서 송악으로 천도를 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송악이 궁예가 도읍한 적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었네. 새로이 궁궐을 신축하지 않아도 되는 큰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궁궐을 보수해서 쓸 수 있었지.”
“저도 오늘 조정에서 금상의 한양천도 발언에 내심 놀랐사옵니다. 개경은 태조 왕건 대왕의 혼이 살아 숨 쉬는 땅이옵니다. 또한 100년 가까이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수탈당한 고려 조정의 재정 형편상 새로 궁궐을 신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옵니다.”


“율정, 자네가 한양천도의 불가함을 금상께 상주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네.”
“시중 어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으니, 제가 한 번 나서보지요.”
“고맙네. 율정.”

다음 날 아침. 
첨의찬성사 윤택은 일찍이 입궐하여 여러 중신들에게 한양천도의 불가함에 대해 협조를 구하고 난 후 어전회의에 나가 공민왕에게 상주했다.
“전하, 중 묘청(妙淸)이 인종을 유혹하여 나라를 거의 망하게 할 뻔한 경험과 교훈이 멀지 않사옵니다. 지금 사방에서는 사변이 일어나 군대를 훈련하고 먹이는 데도 오히려 재정이 부족하옵니다. 그런데 만약 천도를 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킨다면 나라의 재정이 고갈되고 백성들에게 해를 줄까 두렵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고인이 된 성산군 이조년의 손자인 정당문학 이인복이 가세했다.
“전하, 태조 왕건 대왕께서는 고구려의 고도 서경을 중요시 하고, 옛 땅을 찾으려는 북진정책의 전진기지로 삼아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사옵니다. 또한 서북면을 개척하고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여진족의 거주지를 공략하여 오늘의 국경선의 기틀을 확보할 수 있었사옵니다. 따라서 개경을 두고 남쪽으로 천도한다는 것은 열성조들이 지하에서도 가납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작년에 전하께서 동·서북면의 옛 강토를 회복한 것은 만주 땅까지도 염두에 둔 원대한 꿈이 서려있는 것이옵니다. 전하, 첨의찬성사 윤택의 간언을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조정의 만조백관들은 누구 하나도 윤택과 이인복의 ‘한양천도 반대’ 간언에 반대하지 않았다. 공민왕도 명망 있는 학자들의 간언을 거부할 수 없었다. 특히 ‘동·서북면의 옛 강토 회복이 만주 땅까지도 염두에 둔 원대한 꿈’이라는 부분에 가서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로 인해 당연히 한양천도론은 없던 일이 되었다. 
마침내 이제현의 경륜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이제현은 조정 관원들의 수장답게 자신의 문생들의 손을 빌어 한양천도 반대라는 국가대사를 큰 소란 없이 해결한 것이다. 

정계은퇴, 비운의 여인

원나라의 정세는 폭풍전야와 같았다. 
1356년 주원장은 원 왕조의 강남 경영의 거점인 집경(集慶, 뒤의 남경)을 점령했다. 주원장은 집경을 응천부(應天府)라 개명하고, 스스로를 오국공(吳國公)이라 자칭했다. 이는 자신이 반란군의 지휘관에서 벗어나서 천하를 노리는 대망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현은 ‘한양천도불가론’이 가닥이 잡히자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를 멀리하고 한족의 부흥을 측면 지원해야 한다는 ‘반원부한(反元復漢)’ 운동이 조정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거세게 일어났다. 이제현은 원이 머지않아 멸망하고 주원장이 새로운 한족 나라를 세울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가 망한다손 치더라고 하루아침에 망하는 것이 아닌 만큼 급진적인 개혁은 고려 조정에 많은 혼란과 시행착오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그였다.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칭기즈칸을 보좌하여 몽골제국을 건설한 유목민 정신의 수립자로 몽골에 부와 평화를 가져다 준 대정치가이자 명재상이었다. 몽골의 2대 황제 태종(오고타이)이 “칭기즈칸이 이룩한 대제국을 개혁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야율초재에게 묻자, 그는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합니다(興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흥일리불약제일해 생일사불약멸일사)”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제현은 문득 야율초재를 생각했다. 그는 ‘반원운동에도 속도조절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과격한 개혁은 항상 시행착오와 후폭풍을 가져온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배워온 터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반원부한 운동의 수습에 의연히 나섰지만 시세가 여의치 못했다. 오히려 조정 일각에서는 근거 없는 풍설과 모함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 나라의 정사가 문하시중에 의해 독단으로 처결된다.”
“익재 대감은 소심해서 반원부한의 의지도 소명의식도 없다.” 

문하시중 이제현은 자신이 영도하던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기엔 자신이 너무 노쇠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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