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격려해주고 성원해준 국민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미국도 한국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지난 6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로버트 김(64·한국명 김채곤)이 던진 일성이다. 미국에서 국가기밀 유출 혐의로 수감됐다가 9년 8개월 만에 완전한 ‘자유인’이 된 로버트 김이 조국의 품에 안겼다. 스파이로 몰려 영어의 몸이 된지 약 10년만이다. 조국은 로버트 김을 외면했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귀국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로버트 김. 그가 스파이로 몰린 사건의 진실과 파란만장한 인생 유전을 되짚어 봤다.



체포에서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1996년 9월24일 미 해군정보국(ONI) 군무원으로 근무하던 로버트 김이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에 국가기밀을 누출했다는 혐의였다. 김씨가 체포되기 정확히 6일 전, 한국에서는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해안으로 북한의 소형 잠수함이 침투하여 좌초된 초대형 안보사건이 있었다. 미국이 북잠수함의 이동로를 알면서 한국에 알려주지 않았다고 생각한 백동일 대령은 김씨에게 관련 정보를 요청했다. 북잠수함의 경로를 추적한 김씨는 두 척의 잠수함이 동해안을 오고 간 위치들이 추적되었다고 백 대령에게 알려주었다. 이날 통화 이후 로버트 김은 FBI에 의해 체포되었다. 김씨는 간첩죄에 해당하는 ‘국방기밀취득음모죄’로 법정최고형인 징역 9년에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았다. 전도유망했던 엘리트가 순식간에 ‘스파이’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김씨가 조국을 위해 정보를 건네다 미국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97년 국회의원과 종교계 인사를 중심으로 로버트 김 구명위원회가 조직됐다. 또 1999년에는 김씨의 고향인 여수에서도 구명위원회가 조직돼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당시는 YS 정부의 권력 누수현상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재벌들의 부도와 경제위기설이 퍼지고 있던 시기로 당시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한보비리와 청문회’에 쏠려있었다. 또 한보 정태수 회장의 재판이 열릴 무렵에는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에 대한 재판도 열리고 있었다. 이국 땅에서 미국을 상대로 벌이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교포를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다. 한국 정부는 전혀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것이 당시 정부의 입장이었다. ‘나는 조국이 버린 미운 오리새끼입니까’라는 김씨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미국 눈치보기에 급급했던 정부는 철저히 그를 외면했다.미 연방 교도소에 수감됐다 풀려난 뒤 보호관찰을 받아온 김씨는 올 10월 4일 미 버지니아주 동부지방법원이 김씨의 보호관찰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여 당초 2007년 7월 24일까지로 예정됐던 보호관찰을 끝내게 됐다. 이로써 김씨는 7년6개월의 수감생활을 포함해 9년 8개월 만에 완전한 ‘자유인’이 됐다.

어떤 정보를 제공했나

로버트 김과 백대령을 몰래 감청한 결과 둘 사이에 정보가 교류된 사실을 알아낸 FBI는 컴퓨터 전문가인 김씨가 ‘극비(top secret)’ 또는 `비밀(secret)’로 분류된 미 해군의 기밀문서에 접근해 30여건 이상의 정보를 백 대령에게 빼돌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씨는 미국 안보를 해칠 의사는 처음부터 없었으며, 백대령에게 제공한 정보도 미국 국방과 안보에 관련된 사항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그렇다면 실제로 당시 김씨가 백대령에게 준 정보는 어떤 것이었을까. 당시 한국은 미국과의 정보공유 체제에서 배제된 상황이었다. 1996년 동해를 통해 강릉에 침투한 북한 잠수정이 좌초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씨는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이었던 백동일 대령의 요청에 따라 한반도 관련 정보를 건네줬다.

김씨가 전달한 정보들은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 배치실태, 북한의 무기 수출입 현황, 북한주민과 북한군의 동요 여부, 국제사회가 보내준 식량의 유입여부,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 배치 실태, 북한 주민의 탈북실태, 북한해군의 동향 등 한국정부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들이었다. 주목할 것은 김씨의 행동이 어떤 대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조국을 돕겠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김씨는 정보를 전달한 백 대령은 물론 한국정부로부터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 그가 스파이가 아님을 입증하는 부분이다.체스넛 검사는 최후 논고에서 “로버트 김은 그의 고용주인 해군 정보국은 물론 미 합중국의 시민으로서의 중요한 책임을 저버리고, 타국(한국)에 대한 사랑을 택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에 입국한 직후에도 김씨는 “나는 스파이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고용한 사람도 아니었다. 백 대령과 친분관계에서 출발해 때로는 그의 요청에 의해, 때로는 자발적으로 그러나 ‘대가 없이’ 정보를 우송했을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1급정보 다룬 유일한 동양인

1940년 부산에서 출생한 김씨는 대학을 졸업한 후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간다. 단돈 50달러를 갖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다. 그는 미국 유학 4년 만인 1970년, 31세 되던 해 NASA에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NASA에 최정예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시민권이 없는 외국의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는데 이것이 김씨가 NASA에 들어가게 된 배경이다. 4년 후인 1974년, MITRE CORP.에서 교통관련 업무를 맡은 김씨는 그해 시민권을 획득하고 본격적으로 과학기술 관련 업무를 하게 된다. 이어 1978년부터 미 해군정보국(ONI)에 들어간 그는 줄곧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해군 정보국에서 로버트 김의 직명은 컴퓨터 정보분석관으로 미군 정부 컴퓨터 시스템인 JMIE의 디자인, 개발, 그리고 유지에 대한 기술적인 관리를 맡고 있었다. 중대한 기밀을 다루는 해군정보국의 채용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이력서를 접수받고도 1년 이상 철저한 신원조회를 거친 뒤에야 채용하며, 근무 1년이 넘은 사람만이 1급 정보를 볼 수 있을 정도. 그는 해군정보국 1,200여명 직원 중 유일한 동양계로, 당시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의 국가 특급 정보를 다루는 사람은 전무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김씨가 미국의 1급 정보를 다룰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미국사회에서 그 능력과 신용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아웃소싱 예산만 200만불 이상이 소요되는 중대한 프로젝트를 관리할 정도로 그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승진과 수상 경력도 많았으며, 체포 당시에도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그러나 조국을 사랑한 대가는 혹독했다. 평생을 쌓아온 사회적 지위 및 신망, 명예는 송두리째 날아갔다. 무엇보다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사회에서 ‘스파이’로 낙인찍힌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이익과 편견을 감수해야 했다. 그의 인생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조국을 사랑한 대가 ‘혹독’

무엇보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수감 직후 모든 수입이 끊긴 김씨는 결국 1998년 파산선고를 받았다. 간첩죄 전과로 인해 그는 연금 혜택도 받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고정 수입이 없어진 그의 가족은 늘상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조국을 떠난지 37년이나 되는 그로서는 미국 시민으로서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이 꼭 알아야 함에도 공유하지 못하는 정보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제공했고, 그로 인해 미국 사회에서 스파이로 매장당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미국 한인교회에서도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던 그였지만 사건이 터지자 교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미국사회에서 ‘스파이’는 안보를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자에 속한다. 미국에 터를 두고 살아가는 교민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괜한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 사건이 되도록 빨리 잊혀지기를 원했다.

결국 김씨는 자신이 도우려고 했던 조국에 이어 자신을 지지할거라 믿었던 교민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등 이중의 상처를 입은 것이다.‘안데스 산맥의 이쪽 정의가 저쪽에서는 불의가 된다’는 파스칼의 말은 모국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스파이’로 몰린 로버트 김의 상황과 기묘하게 맞아떨어진다. “한국정부와 정치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할 때는 재외한국인도 같은 한국인이라며 조국을 위해 도와 달라고 호소하다가 정작 그 일을 도운 사람이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외면한다면 어느 누가 조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로버트 김의 의미심장한 발언 속에는 조국애와 국가의 책무를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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