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 딱딱하게 굳어지는 ‘폐섬유화’ 진단 받은 피해자도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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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지난 2011년 대한민국 국민들을 분노와 슬픔에 빠트렸다. 가습기 분무액에 포함된 살균제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폐질환이나 전신질환 등을 호소했고,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2012년 10월 8일 기준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집계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사망한 사람은 영유아 36명을 포함, 1400여 명에 이른다. 당초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질환으로 알려졌던 이 병의 원인이 역학 조사 결과 가습기 살균제로 알려지며 한국 사회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 2011년 11월 11일 문제의 살균제 6종이 회수됐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은 여전하다. 그런데 군에서도 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고, 실제로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논란이 일고 있다. 8년여가 지나서 사건이 알려진 탓에 군이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육·해·공군서 12년간 800개 구매해 사용

“군이 8년 간 모르는 척” 비판 여론 쇄도

지난 19일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는 가습기 살균제가 군대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됐다며 이로 인한 폐질환 발생 피해자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참위는 지난 7월부터 군의 가습기 살균제 사용 실태 조사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살균제 사용과 구매 문서를 확보하고 피해자 진술까지 얻어냈다. 그 결과 육·해·공군 및 국방부 산하 부대·기관 최소 12곳에서 2000년부터 2011년까지 약 12년 동안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육군 제 20사단에 복무했던 장병의 진술에 따르면 이 부대는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겨울철 중대 생활관에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병사는 약 50~60명가량이다. 공군의 경우 기본군사훈련단에서 2008년 10월 애경산업 제품인 ‘가습기메이트’ 390개를 구매했다. 이 가습기 살균제는 신병교육대대 생활관에서 사용돼 신병 교육을 받던 병사들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강원도 횡성 소재 공군 제8전투비행단에서도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제8전투비행단에서 근무했던 병사 황모(34)씨는 사참위에 “겨울철 일과 후 취침 시 생활관에서 가습기를 사용할 때 쓰도록 가습기 살균제를 보급 받았던 것 같다”고 증언했다. 이어 “(가습기에) 새로 물을 넣을 때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것 같다”며 “가습기 살균제는 방 안의 티브이 수납장 같은 곳에 방마다 한 개씩 보관했다”고 설명했다.

해군도 마찬가지였다. 사참위가 ‘국방전자조달시스템’ 검색을 통해 확인한 결과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1년까지 해군교육사령부, 해군작전사령부, 해군사관학교, 국방과학연구소 등에서 총 57개의 가습기 살균제를 조달해 사용한 기록이 확인됐다. 군 병원의 경우 국군수도병원과 국군양주병원이 애경산업의 ‘가습기메이트’를 각각 290개(2007~2010년)와 112개(2009~2011년) 구매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첫 피해자 등장…“피해자 더 많을 것”

사참위는 군의 가습기 살균제 사용 피해자도 확인했다. 사참위에 따르면 이모(30)씨는 2010년 1월부터 3월까지 국군양주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이 씨는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돼 폐섬유화 진단을 받았다. 그는 2016년 정부에 가습기 살균제 건강피해 신고를 한 뒤 2017년 폐손상 4단계 판정을 받았다. 정부는 폐손상 3~4단계 환자의 경우 가습기 살균제와 질환의 인과관계가 적은 것으로 보고 제대로 된 피해 보상을 해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폐손상 3~4단계 피해자들의 피해 정도는 결코 작지 않다. 실제로 지난 4월에는 폐손상 4단계 피해자였던 40대 남성이 폐질환으로 숨지는 일이 있었다. 이에 따라 사참위는 정부가 기존에 정한 피해자 인정 기준이 너무 엄격하고 협소하다며 인정 기준과 구제 대상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군에서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첫 피해자가 등장하며 사참위의 주장에 힘이 실릴 전망이다. 사참위는 피해자가 더 많을 것으로 보고 군대 내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구매·사용한 모습을 본 목격자와 군 복무 중 가습기 살균제로 의심되는 건강피해를 본 사람들의 제보를 받고 있다.

“알려지지 않은 피해 더 많을 것”

현재까지 사참위가 파악한 가습기 살균제 사용 범위는 군 부대 12곳에서 3종류 800여 개다. 하지만 이는 현재까지 확인된 수치일 뿐 실제로는 더 많은 양의 가습기 살균제가 군에서 사용됐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보급 분야에서 복무했던 전직 대령 A씨는 사참위에 “군대 내에서 소모하는 생활용품의 경우 조달시스템을 통해 구매하는 경우는 극소수”라면서 “실무부대에서 물품 구매비·운영비로 구매한 가습기 살균제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해 실제 사용 부대가 더 많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최예용 사참위 부위원장은 “군에서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성을 알면서 보급품으로 사용했을 리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알려진 뒤에는 군에서 가습기 살균제가 얼마나 사용됐는지 파악하고 노출된 병사와 직업 군인 등의 피해를 조사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난 8년 동안 군이 가습기 살균제 문제에 대해 모르는 척 침묵하고 있었다면 이는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해치는 문제”라고 덧붙였다.

사참위는 오는 27일부터 열리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 청문회에서 군 관계자들을 증인으로 소환할 예정이다. 사참위는 “지금까지 피해자 조사 등이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 등을 질의할 것”이라며 “군대 내 가습기 살균제 사용실태 전수조사 및 피해자 신고센터 설치도 요구하겠다”고 전했다. 군대 내 피해자 신고센터 설치 전까지 피해 제보는 특조위(1899-3183)로 하면 된다.

국방부 “유해성 확인 즉시 사용금지 지시…조처 강구할 것”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등장하는 등 논란이 커지자 국방부는 “군은 2011년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이 확인된 즉시 사용금지를 지시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현재 (군 내에서) 가습기 살균제 관련 피해사례는 확인된 바 없다”면서도 “전 부대를 대상으로 군의 피해 여부 등 실태 조사를 진행해 필요한 조처를 강구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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