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운동장’에 수평을…여성 보좌진 기반 익명 페미니스트 그룹

[일요서울 | 강민정 기자] 지난해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한 큰 흐름 중 하나는 ‘미투(metoo·나도 말한다) 운동’이었다. 문단과 예술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위계·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털어놓았다. 그동안 암암리에 자행되던, 혹은 ‘관행’이라 여기던 그것들이 바로 ‘성폭력’이라는 외침이었다. 당시 정치권에서도 ‘안희정 성폭력 사건’, ‘국회 1호 미투 운동’ 등 미투 운동이 이어졌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 여의도에선 작은 변화가 생겼다. ‘성평등한 국회’를 만든다는 가치를 공유한 국회 내 여성 보좌진이 자발적으로 모여 ‘국회페미’라는 단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미투 운동 그후’ 여의도의 모습을 일요서울이 살펴봤다.

국회 곳곳에 붙은 국회페미의 “여자는 보좌관하면 안 되나요?” 포스터. [사진=국회페미 제공]
국회 곳곳에 붙은 국회페미의 “여자는 보좌관하면 안 되나요?” 포스터. [사진=국회페미 제공]

- “‘쟤는 뭘 좀 알아’?…너 보라고 그렇게 입은 거 아니다”…국회, 성불평등 여전 
- “커피는 여자가 타야 제맛입니까?” “여자는 보좌관하면 안 되나요?” 

국회는 ‘민의의 전당’이라고 불린다. 민의를 국회에 오롯이 반영하기 위해선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 차별을 배제하고 가장 공평해야 하는 곳이 바로 국회다.

하지만 국회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또 다른 별칭도 갖는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어느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도나 질서가 존재해 다른 한쪽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어려운 상황을 비유하는 단어다. 

성평등한 국회를 실현하고자 모인 국회 내 여성 보좌진 기반 페미니스트 그룹 ‘국회페미’에 따르면 국회 전체 보좌진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38.2%다. 직급별 비율로는 ▲4급 보좌관 8.6% ▲5급 비서관 19.9% ▲6급 비서 26.7% ▲7급 비서 37.4% ▲8급 비서 60.5% ▲9급 비서 63.3% ▲인턴 비서 52.3%로 집계됐다. 국회의원도 다르지 않다. 20대 국회에서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은 17%다.

이처럼 상위 직급일수록 여성의 비율이 감소하는 현상은 남성지배주의적인 대부분의 조직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다. 흔히 ‘유리천장’이라고들 표현한다.

이 문제가 비단 국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나 ‘모두에게 평등해야 할’ 이곳에서도 재현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이에 대해 국회페미는 “노동자로서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건 보좌진 모두가 겪는 문제이나 국회에서 여성은 허드렛일 하는 사람으로 대상화되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정하게 능력을 펼칠 기회를 주지 않고 승진에서 누락시켜 하위 직급으로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이후 결성돼…1년 맞이해

국회 내 성불평등의 고충을 털어놓는 익명의 페이스북 페이지 이름이 ‘기울어진 여의도동 1번지’인 것은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페이지에서 한 게시자는 “‘지금 (남자) 아무도 없어요? 지금 (여자) 아무도 없어요?’”라며 “전자는 말 들어줄 사람, 의논할 사람이 없느냐는 거고 후자는 차 대접할 사람, 심부름 할 사람 없냐는 의미”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게시자는 “보좌관님, 그 의원실 여성 비서가 당신 보라고 옷 예쁘게 입고 다니는 거 아니다”라면서 “‘쟤는 뭘 알아’ 소리 좀 그만하라”고 질타했다.

여전히 국회에 여성 보좌진을 대상화하거나 그들에게 ‘여성’으로서의 업무를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기울어진 여의도’에도 수평을 찾으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바로 ‘국회페미’의 결성이다. 국회페미는 국회 내 남성지배적인 문화를 부수고 일터로서 성평등한 국회를 만들자는 가치를 공유한 이들이 뜻을 모아 만든 단체다.

지난해 8월 16일 결성된 그해 국회페미는 9월 19일 국회 성차별 타파 슬로건 캠페인을 게시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국회페미는 “일터로서 성평등한 국회를 만드는 것은 국민의 절반인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서민의 권익을 위하는 국회를 만드는 것과 맞닿아 있다는 기치 아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며 “현재 30여 명의 인원이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뒤 같은 해 12월 18일 ‘여성에게 국회는 없다’는 성명문을 발표하고, 올해 4월 17일 성평등한 국회를 만들기 위한 제21대 총선 ‘국페미’ 후보 가상 출마 이벤트 등을 열어 존재를 알렸다.

국회페미의 활동이 언론 등을 통해 세간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지난 6월 5일 진행한 ‘커피는 여자가 타야 제맛입니까?’라는 이름의 캠페인이었다. ‘일터로서 성평등한 국회 만들기 캠페인’의 첫 발이었다. 

이어 지난 16일 ‘여자는 보좌관하면 안 되나요?’라는 두 번째 캠페인을 실시했다. 이들은 해당 문구가 인쇄된 전단지 수백 장을 국회 공개게시판 등에 부착해 국회 구성원들의 성인식을 환기하고 있다.

이 같은 캠페인이 국회 내에서 어떤 반향이 있었는지 묻자 국회페미는 “이전까지는 보도자료를 보내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기반으로 활동해 성평등 문제에 관심이 많은 기자 및 언론사와 시민들만이 우리의 활동을 알고 있었다”며 “지난 6월에 시작한 ‘커피는 여자가 타야 제맛입니까?’ 캠페인부터 전단지 수백 장을 한 달 동안 국회 공개게시판 여러 곳에 부착했고 보도도 많이 돼 이를 계기로 많은 의원, 보좌진 등이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일련의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회페미는 “남성지배주의적인 대다수의 직장, 공동체에서 페미니즘을 기성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한 맥락에 있다”며 “조직이 기대하는 ‘여자다움’을 갖지 않은 여성 보좌진은 문제적인 존재로 여겨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렇기에 국회페미 활동 사실은 물론,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을 표현하기에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미투 법안’·‘인권센터’ 여전히 국회 표류 중

변화의 움직임은 환영받을 일이나, 아직까지 국회는 성평등 문제 개선에 인색한 모습이다. 지난 ‘안희정 성폭력 사건’과 ‘국회 1호 미투 사건’이라는 전례와 같이 심각할 경우 여성 보좌진을 대상으로 성폭력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상명하복 조직 구조와 보좌진의 생사여탈권을 각 의원실이 쥐고 있다는 데 따른 폐해다. 

이와 관련해 국회페미는 “국회는 인사권이 100% 각 의원실의 재량에 맡겨져 있다”며 “부당해고, 승진불평등, 낙하산 문제 등 특별한 기준 없이 의원과 보좌관의 선호에 따라 인사가 이뤄지는 곳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른 의원실에 지원하는 경우에도 직전 근무 의원실 보좌관, 국회의원의 평가가 절대적으로 반영돼 인사불공정에 문제를 제기하기 매우 어려운 환경”이라고 부연했다.

지난해 3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자신의 수행비서에게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가해 세간에 충격을 줬다. 같은 해 8월 14일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에게 “위력은 있으나 행사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해 도마에 올랐다. 이와 달리 안 전 지사는 지난 2월 1일 항소심에선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한 최종심은 오는 9월 30일까지 치러져야 한다.

같은 시기 벌어진 ‘국회 1호 미투’는 4급 보좌관 A씨가 같은 의원실에서 근무하던 5급 비서관 B씨를 추행했고, 미투 국면 당시 B씨가 피해 사실을 국회 홈페이지에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라는 글을 통해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된 사건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A씨는 올해 1월 18일 서울남부지검에 강제추행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다만 폭로 후 A씨에 대한 국회 차원의 대처가 미비했단 지적이 있다. B씨의 폭로 다음 날 A씨가 근무하던 의원실은 곧장 그에 대해 면직 의사를 밝혔으나 국회사무처에서 이 처분이 보류됐다. 

보좌진은 별정직 공무원으로 의원이 임면권을 갖고 있어 사무처에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처리 규정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요서울이 감사 결과와 면직 처분 등 추후 진행 과정을 묻자 국회 사무처는 “감사 결과나 면직 처분 등은 인사 관련 문제로,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고 답했다.

아울러 비슷한 시기 국회 인근 식당 여자화장실에서 휴대전화로 20대 여성을 불법 촬영한 혐의로 현행범 체포됐던 국회사무처 6급 공무원 C씨는 국회에 복귀한 것으로 전해졌다. 

C씨는 서울남부지법에서 약식 기소돼 벌금 300만 원과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를 언도받았다. 이로 인해 C씨는 당초 해임처분을 받았으나, 소청심사위원회 결과 징계처분이 ‘강등’으로 감경됐다는 것이다.

지난 4월 개정된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 임용의 결격과 당연 퇴직 사유에 해당하는 성범죄의 범위를 보다 촘촘히하고 있다. 성범죄의 범위를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에서 모든 유형의 성폭력 범죄로 범위를 넓혔고, 퇴직사유에 해당하는 벌금형 기준도 기존 300만 원에서 100만 원으로 낮춰졌다.

한편 미투 국면 당시 들끓었던 국회에서도 점차 김이 빠져 가는 모양새다. 먼저 당시 이러한 성불평등 문제를 지적하면서 ‘미투 법안’이 우후죽순 발의됐지만, 모두 국회를 표류 중인 상태다.

국회페미는 “법안을 통과시킬 의지 없이 ‘유행을 타고’ 발의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며 “우후죽순 발의된 각 법안들을 조정해 실질적인 의결을 주도해야 하는 담당 상임위 위원장, 간사, 유관기관 담당자 등이 이 사안에 대한 절박함과 시급성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본다”고 일갈했다.

이와 더불어 국회는 국회 내 인권전담기구인 인권센터를 설립해 외부 전문가를 배치해 국회 내 성평등 교육과 성폭력 상담 업무 등을 돕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국회 내 인권센터는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다.

진행 상황에 관해 묻자 국회 사무처는 “(인권센터가) 설립되려면 직제(職制·국가의 행정기관이나 그 밖의 단체, 조직 등에 관한 제도 또는 법규)가 개정돼야 한다”며 “이 개정안이 국회 운영위원회에 계류 중이다”라고 답변했다. 법안의 발이 묶여 있어 인권센터 설립 또한 어렵단 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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