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한국 여자 골프선수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메이저대회 우승 소식이 들려왔다. 브리티시여자오픈 정상에 우뚝 선 장정(25). 미국 진출 후 6년 만에 이룬 쾌거다. 그의 우승은 ‘골프 여제’로 불리는 세계 최강 아니카 소렌스탐과의 맞대결에서 이룬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우승 트로피를 안을 때까지 보여준 흔들림 없는 모습. 무명의 설움을 딛고 오직 인내와 노력으로 일궈낸 우승이라는 것 역시 그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151cm, LPGA 최단신이라는 신체조건으로 세계 정상에 오른 장정, 그는 누구인가.

‘무명’임에도 ‘이변’ 아니다

영국 사우스포트의 로열 버크데일골프장(파72·6,436야드). 올시즌 LPGA 투어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브리티시여자오픈(총상금 180만달러) 마지막 라운드가 펼쳐지고 있다. 지난 2000년 이 대회 우승자인 소피 구스타프손(스웨덴)이 맹추격해오고 있는 상황. 장정은 구스타프손을 4타차로 제치고 정상에 섰다. 첫 날부터 한 순간도 선두 자리를 내주지 않는 와이어투와이어(Wire to wire) 우승을 거머쥔 장정. 그는 박세리(28·CJ) 박지은(26·나이키골프) 김주연(24·KTF)에 이어 한국인으론 네 번째로 LPGA 메이저 챔피언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번 대회 상금만 28만달러, 시즌 상금액을 74만4,161달러로 늘렸으며, 상금 랭킹도 한국 선수들 중 가장 높은 6위로 뛰어 올랐다. 비록 ‘무명’이었지만 그의 우승을 두고 ‘이변’을 입에 올린 사람은 없다. LPGA 데뷔 6년, 제대로 된 스폰서도 없이 힘든 투어를 이어온 장정에겐 화려했던 아마추어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금’으로 투어 경비 충당

대전 중앙초등학교 6학년 때 골프에 입문, 그의 이름이 알려진 시기는 유성여고 재학중일 무렵이다. 97년 한국여자오픈에서 김미현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98년엔 한국여자아마추어선수권에서도 정상에 섰다. 방콕아시안게임에선 얼마 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김주연과 함께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따냈으며, 개인전 동메달도 획득했다. 하지만 프로의 길은 험난했다. 99년 프로 테스트 이론시험에서 답안지를 밀어 쓰는 실수를 한 이후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박세리에 자극 받아 장정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지만 퀄리파잉스쿨에서 풀시드를 따내는데 실패했다.

2000년 조건부 시드로 LPGA 무대를 밟고 데뷔 첫 해부터 다섯 차례나 ‘톱10’에 진입했으나 우승하는 데 6년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LPGA 진출 후 준우승만 세 번. 세이프웨이 챔피언십에선 첫 우승을 예견했으나 마지막 홀에서 김미현에게 동타를 내주고 연장전에서 역전패. 작년 켈로그키블러 클래식 두 번째 준우승에 이어 올해 사이베이스클래식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해마다 상금랭킹을 끌어올렸다. 작년에는 68만달러를 벌어들여 상금 랭킹 12위까지 올랐다. 그럼에도 장정의 고달픈 투어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상품성’이 없다는 이유로 변변한 스폰서 하나 잡지 못하고 6년을 보낸 것이다. 상금만으로는 투어 경비 충당하기도 빠듯했다.

경찰관 아버지의 명예퇴직


열악한 환경임에도 미국 진출 6년 만에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데는 가족들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정의 둘째 언니 은경(28)씨는 홀로 대전 집을 지키며 살림을 꾸리고 있다. 스폰서가 없는 동생을 위해 자신이 다니는 화장품업체를 통해 약간의 금전적인 지원을 끌어낸 것도 바로 그다. 큰언니 미경(30)씨는 4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장정의 매니저로 스케줄 관리와 장거리 운전을 도맡고 있다. 151cm로 LPGA 최단신이라는 장정에 견줘 큰언니가 173cm이고 둘째 언니는 162cm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이들 집안의 신체조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장정의 가장 큰 힘은 아버지 장석중(60)씨다. 장씨는 경찰관으로 30년 동안 근무, 스폰서가 없는 장정의 투어 경비를 대기 위해 명예 퇴직했다. 아버지의 퇴직금과 어머니 이경숙(53)씨의 식당 운영으로 어렵사리 6년을 버텨왔던 것이다. 장정 역시 브리티시오픈 우승 이후 인터뷰에서 “성공은 저를 위해 모든 걸 바치신 부모님 덕분이에요”라고 부모님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별들의 잔치’ 출전자격 얻어


장정은 낙천적인 성격이다. 그는 우승 후 투어 생활의 고달픔이 밀려오면 큰 언니, 둘째 언니한테 투정도 부리고 수다를 떨면서 잊었다고 밝혔다. 경기를 망치고도 천진난만한 얼굴로 취재진의 인터뷰에 응해 기자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쌍꺼풀 수술을 받은 것도 스스럼없이 얘기할 정도다. 게다가 투어를 함께 하는 선후배들 사이에서도 분위기 메이커로 인정받을 정도로 명랑소녀로 통한다. ‘명랑한 성격’을 갖고 있기에 오랜 무명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라고 주니어 시절 장정을 6년간 지도해 온 김홍식 대전 유성컨트리클럽 헤드프로도 그의 원만한 성격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신장의 열세를 극복하려했던 장정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스승은 “승부욕이 무척 강했다”고 기억했다. 153cm로 ‘땅콩’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김미현보다 키가 작은 장정은 ‘울트라 땅콩’으로 불린다. 브리티시여자오픈 챔피언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장정은 오는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저트팜에서 열리는 LPGA 투어 삼성월드챔피언십에 출전 자격을 얻었다. 정상급 선수 20명만 초청되는 이번 대회에서 최저타 1위 박지은과 US여자오픈 챔피언 김주연과 함께 ‘별들의 잔치’에 초대된 것이다. 장정은 지난 2일 귀국, 20일 개막되는 세이프웨이 클래식까지 짧은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다.

# 충청도 골프, LPGA 메이저대회 석권 박세리-장정-김주연

“정상에서 만납시다.” 어린 시절 골프와 함께 우정을 쌓았던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이 LPGA 무대를 주름잡고 있다. 박세리-장정-김주연이 그 주인공. 이들은 길지 않은 삶 속에서 인연을 이어오며 또 한번의 정상 재패를 위해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올 시즌 마지막 여자골프 메이저대회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장정(25)과 그보다 앞서 지난 6월 US여자오픈 우승컵을 안은 김주연(24)은 1년 선후배 사이다. 선배로서 LPGA 무대에 가장 먼저 진출한 박세리(28)는 이들을 ‘인연의 끈’으로 묶어주고 있다. 박세리와 장정은 대전 유성의 이웃사촌이다.

장정의 둘째언니는 박세리와 유성 유아원 동기생으로 서로 집에 놀러 다닐 만큼 가까웠다. 이들의 인연은 이웃사촌인 마크 오메라와 타이거 우즈를 방불케 한다. 당시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골프채를 처음 잡았던 장정은 이웃집에 사는 박세리의 영향을 받았다. 장정의 아버지 장석중씨는 박세리를 보고는 어려서부터 운동신경이 뛰어난 막내 딸에게 클럽을 쥐어줬다. 장정은 유성여고에 재학하면서 아마추어 최강으로 군림했던 박세리를 목표로 운동에 전념했다. 유성에서 차로 30분 거리인 충북 청주시 상당고를 나온 김주연 역시 고교 시절 우상은 박세리였다. 박세리가 고교 졸업 후 서울에서 훈련할 때는 같은 아파트에 머물며 틈틈이 개인 지도를 받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US여자오픈 시상식 후 김주연은 우승 뒤풀이도 박세리와 함께 했다. 한편 장정과 김주연은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지난 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은메달을 이끌었다. 충청도에서 골프로 인연을 맺은 이들은 미국 진출 후 첫 우승을 메이저 타이틀로 장식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박세리는 98년 LPGA챔피언십에 우승한 뒤 그해 US여자오픈을 제패했고 2001년에는 브리티시여자오픈 정상에 섰다. 뒤 늦게 LPGA에 진출한 장정과 김주연은 선배 박세리의 뒤를 이을 차세대로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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