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현 교수
문주현 교수

20198월 현재 탈원전 망령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순한 양처럼 겉모습을 탈바꿈했지만, 탈원전의 사나운 속내를 감추고 있는 에너지전환정책이, 객이 남몰래 뒷문으로 숨어들어 안방 차지하고 주인장 행세하듯, 절차 무시하고 제대로 된 의견수렴 없이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과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에 자리 잡고 이제는 국가 계획입네주인장 행세를 하고 있다.

탈원전 광풍에 원자력산업계는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고사하고 있다. 학계와 연구계는 미래가 뿌리째 뽑히고 있다. 탈원전 정책은 원자력계만 깊은 상처를 내고 끝나지 않았다.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토네이도처럼 우리나라와 국민에게서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고 있다.

국가 에너지의 미래를 잃었다. 에너지정책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기에 앞서 에너지수급 상황, 이행과정 상 문제점 예측, 해결방안 모색 등 긴 호흡을 갖고 면밀하게 이뤄져야 했다. 합리적 논의 구조 하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져야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지금은 신재생 살면 원자력 죽고, 원자력 살면 천연가스 죽고처럼 에너지원간 적대 구조가 형성되면서, ‘당장 죽게 생겼는데, 앞으로 십 년, 백 년 뒤 미래를 운운하는 건 공염불이라는 짧은 생각들만이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오죽했으면, 3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신재생을 제외한 에너지원간 비중을 정하지도 못했을까?

사람을 잃었다. 전임 산업부 장관은 정부 관계자로서는 처음으로 원전 마피아를 인정하였다. 정부 정책을 옹호하는 언론과 단체도 탈원전 문제점을 지적하고 합리적 에너지 정책 수립을 촉구하는 사람들을 핵마피아’, ‘자기 먹거리 지키려는 이기적 집단으로 매도한다.

정부는 논리와 근거로 정책의 타당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지 않고, 반대 그룹을 범죄 집단으로 낙인찍고 그들의 문제 제기를 집단 이기주의로 폄훼하여 그들 목소리의 힘을 뺀다. 정부의 위압에 그 목소리가 잠시 잦아들 수는 있지만, 원자력인의 마음은 정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그 사람들을 자기편에서 배제해 나간다면, 나중에 정부 편에는 얼마나 남아있을까?

꿈을 잃었다. 내가 아는 한, 거의 모든 원자력인과 기업은 기술자립으로 국가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안고 원자력계에 입문했다. 대학 입시 때나 학기 중 면담에서 만나는 대다수 학생도 이 같이 말하곤 했다. 그런데 탈원전 정책은 그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터전을 없애고 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이 완료되면, 대다수 원자력기업과 원자력기술자들이 직업을 찾아 새로운 곳으로 떠나가게 될 것이다. 꿈조차 꿀 수 없게 된 원자력인과 원자력기업에게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앞으로 그들이 그러지 못했을 때, 그들에게만 오롯이 책임을 떠넘길 수 있을까?

국격(國格)의 기술을 잃는다. 우리나라는 100% 기술 수입한 고리 원전 1호기를 상업운전한 지 30여 년이 지난 2009UAE에 원전을 수출하였다. 여기까지 이른 데는 원자력계 선배들의 각고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77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전력회사는 서머 23호기 공사를 접었다. 경제성이 맞지 않아서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동일 용량 원전 1호기 건설단가가 거의 3배 차이난다.

왜 그럴까? 원전 기술/기자재 공급망(Supply chain)을 자국에 갖고 있느냐에 따른 차이다. 수십 년 간 신규 원전 건설이 없었던 미국은 자국 공급망이 망가져, 거의 모든 기술과 기자재를 외국에서 비싼 값을 주고 사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원전 기술은 갖고 싶다고 아무나 가질 수 없다. 전문 인력과 연관 산업 기반이 뒷받침돼야 한다.

원전을 수출국가라고 했을 때,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선이 달라진다. 원자력은 우리나라의 격을 높여주는, 국격의 기술이다. 탈원전 정책이 지속되면, 많은 원자력 인력과 기업이 원자력계를 이탈할 것이다. 원전 기술 유지 기반이 무너지는 것이다. 기술을 쌓아올리는데 수십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그것의 1/10도 걸리지 않는다.

세계 원전시장을 잃는다. 얼마 전 우리나라가 개발한 제3세대 원자로 ‘APR1400'이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 설계인증을 받았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안전성 요건을 통과한 것이다. UAE에 수출한 APR1400도 차질 없이 건설돼 운영을 앞두고 있다. 같은 노형의 신고리 원전 3호기는 2016년부터 상업운전 중이며, 4호기는 올 8월말 상업운전을 앞두고 있다.

APR1400 안전성과 경제성이 세계 곳곳에서 실증되고 있다.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 원전에 관심을 보였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는 중소형원자로를 공동 개발하고 있다. 우리나라 원전의 수출 가능성이 무르익었었지만, 탈원전 정책으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여 있다. 더 이상 원전을 짓지 않겠다는데, 어떤 나라가 우리나라의 원자로를 사갈까? 지난 수십 년 애써 키워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원전 기술을 스스로 버리고, 수십조 원의 수출시장을 걷어 차버리는 꼴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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