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1357년(공민왕6) 5월초 어느 날. 
초여름의 녹음방초가 한창 무르익어가는 오후였다. 이제현의 서재 안 탁자에 놓인 자기 항아리에는 난초가 청아한 자태를 뽐내고 활짝 피어 있었다. 이제현은 그윽한 난향(蘭香)을 맡으며 햇볕이 내리쬐는 정원의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는 느티나무처럼 많은 가지와 잎을 거느린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고, 그 꿈을 이루어 네 번에 걸쳐 수상을 역임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영욕으로 얼룩진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소년등과 후 연경의 만권당에서 중국의 학자들과 학문을 겨루던 일. 
충선왕이 모함을 받아 토번으로 귀양가자 원 조정에 탄원하여 구해낸 일.
부원배들의 입성책동을 두 번이나 온 몸으로 막아낸 일.
충혜왕이 원나라에 소환되어 구금되자 그 부당성을 탄원하여 구해낸 일.  
충목왕과 공민왕의 초기 개혁을 주도한 일. 
두 번에 걸친 지공거를 맡아 인재들을 발굴하고 키워낸 일.
반원개혁운동을 펼쳐 ‘원간섭기’를 종결시켜 원나라 연호인 지정(至正)을 쓰지 않기로 하고, 관제를 문종 때의 형태로 복구시켰던 일……. 

이제현의 일생은 누가 보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삶이었다. 청렴결백, 공평무사, 신상필벌을 온몸으로 실천했기 때문에 관료와 백성들의 신뢰를 얻었고, 후학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만세에 빛나는 일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제현은 다시 깊은 상념에 잠겼다.

 

내 나이 벌써 71세, 인생의 가을을 넘어 겨울로 들어선 절기가 아닌가. 나는 네 번에 걸친 수상을 역임하면서 고려가 자생력을 잃고 원의 속방(부마국)으로 전락한 이후 작년에 반원운동을 성공시켜 97년 동안 진행되어 온 ‘원간섭기’를 종식시켰다.
인생에서 부귀공명이란 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 물 위의 부평초에 지나지 않은 것을. 그러기에 범려는 오호(五湖)를 떠돌아다녔고, 장량은 적송자(赤松子, 신선)를 찾아갔으렸다.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어졌던 최충(崔沖)은 목종 때 관직에 나간 이후 현종, 덕종, 정종, 문종에 이르기까지 5대를 거치면서 고려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일흔 두 살에 치사(致仕)하지 않았던가. 
‘공을 세웠으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하늘의 도리’라는 노자의 말도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나 높은 지위에 있다 보면 애써 쌓아온 공적도 영예도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이제 후진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물러나자.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빠른 길이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치사(致仕)를 위한 사직상소를 올리다

고려시대 치사(致仕) 제도는 관료의 정년퇴직제도이다.
‘대부(大夫)는 나이 70세면 치사한다’는 《예경(禮經)》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는데, 관직을 왕에게 되돌리고 치사자에게는 관직에 따라 차등 있게 녹봉이 지급되고 일정한 예우가 따랐다. 

며칠 후. 이제현은 입궐하여 공민왕에게 치사를 위한 사직상소를 올렸다.
“전하, 신의 나이 벌써 고희(古稀)를 넘겼습니다. 너무 늙어서 조정의 중책을 감당할 수 없기에 소신 대신에 현인(賢人)을 한 사람 천거할까 하오니, 청허(聽許, 제의를 듣고 허락함)해 주시옵소서.”
“문하시중은 과인을 도와 고려 사직(社稷)을 위해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사직(辭職)을 윤허할 수 없으니 그리 아세요.”
“전하, 계절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사람의 일생도 그러한 즉, 자기 할 바를 다 마치면 미련 없이 후진들에게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고금(古今)의 순리라고 생각하옵니다. 사직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공민왕은 이제현의 말을 듣고 나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문하시중의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과인이 사직을 허락하나, 치사 후에도 군사상의 큰 일을 정할 때나 외교문서에 관한 일, 조정의 중요한 일에 국로(國老)로서 자문에 응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하, 그러하겠사옵니다.”
“아 참, 현인을 천거해 주시겠다니, 그 사람이 과연 누구입니까?”
“염제신(廉悌臣)은 덕망과 경륜을 겸비하고 있으므로, 그 사람이면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려 나가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예, 문하시중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마침내 이제현은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사직의 이유로 나이를 들었지만 건강은 나랏일을 돌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후학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공민왕의 만류를 무릅쓰고 사직을 청했는지도 모른다. 공민왕은 이제현의 업적이 큰 것을 기리기 위해 교서를 내리고 잔치를 베풀어주었으며, 녹봉은 전과 다름없이 지급했다.

“시중 이제현은 여러 대에 걸쳐 가장 뛰어난 유학자이자 삼한의 장로이다. 지금 비록 늙어서 물러나겠다 하나 차마 이를 허락할 수 없으니, 해당 관청에서는 옛 법을 살펴 그에게 궤장(杖, 의자와 지팡이)을 주어 일을 보게 하라.”

한편, 염제신은 이때 기철 일당을 숙청한 뒤 서북면도원수로 원나라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수문하시중을 겸직하고 있었다. 이후 이제현의 천거로 이듬해인 1358년에 문하시중이 되나, 이후 신돈에게 아부하지 않아 모함을 받아 파직 당한다.

이제현이 정계 은퇴를 한 후 10년 동안은 한 마디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자신의 딸이 왕비로 책봉된 일을 시작으로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과 개경탈환전, 연이은 김용의 반란과 최유의 난, 고려의 종말을 예고하는 노국공주의 죽음과 요승 신돈의 본격적인 등장이 고려 조정에 풍운을 몰고 온다. 
이제현은 치사하고 나서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을 기르는 데 전념했다. 또한 사서(史書)를 저술하며 틈틈이 손님을 맞아 술자리를 베풀고 고금(古今)의 일을 비교, 토론하며 소일했다. 한편으로는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국가원로로서 공민왕의 국정 자문에 응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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