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낯선 이름의 국회의원을 마주칠 때가 있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기에 누구보다 국회의원 이름과 얼굴을 많이 기억하는 국회 직원들도 헷갈리는 국회의원의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이런 ‘듣보잡’ 국회의원은 한 부류는 당 지지세가 압도적인 지역을 지역구로 둔 의원이고, 다른 한 부류는 비례대표 의원인 경우가 많다.

당 지지세가 높은 지역을 지역구를 둔 의원들은 비례대표 못지않게 쉬운 선거과정을 치르고 국회의원이 된다. 그러다 보니 국회의원으로서의 기본 소양이나 자질이 갖춰지지 않은 의원들이 배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워낙 지지세가 강해 지역구만 잘 다지고, 당 지도부 눈 밖에 나지 않으면 되는데 열심히 활동할 이유가 없다.

지역구 듣보잡 국회의원보다 더 속 편하게 국회의원의 삶을 즐기는 의원들도 있다. 다음 총선 출마를 포기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다. 더 할 마음이 없다 보니 당 지도부 눈치 볼 일도 없고, 지역구 기웃거릴 일도 없다. 이런 의원들 중 일부는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해 열성으로 활동하고 소신 있는 정치발언으로 비례대표다운 비례대표 역할을 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비례대표 의원이 한 번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이 동하면 그때부터 속내가 복잡해지고 활동이 분주해진다. 일단 다음 총선에 출마할 지역을 정하는 일부터 보통 일이 아니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주인이 있고, 명함을 들이밀어 볼만한 곳은 선거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21대 총선에도 대부분의 비례대표가 지역에 도전할 것으로 보이지만 생환은 장담할 수 없다.

비례대표로 처음 국회에 등원하고 지역구에 도전해서 살아 돌아 온 의원들은 보통 의정활동에서 호평을 받고 정치적으로도 주목받는 경우가 많다. 비례대표로 발탁될 정도의 전문성에 지역구에서 살아남은 정치력과 대중성을 겸비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경원, 박영선, 진선미, 유승민, 심상정, 김현미, 박지원과 같은 이들도 처음에는 비례대표로 국회에 등원했다.

21대 총선을 8개월여 앞둔 지금 다시 하나의 유령이 여의도를 떠돌고 있다. 비례대표라는 유령이다. 이 유령은 공산주의가 아니라서 실체도 있다. 여당이 일부 야당과 손잡고 추진 중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이 통과된다면 비례대표 의석은 전체 300석 중 47석에서 75석으로 대폭 늘어난다. 그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들도 우후죽순으로 출몰하고 있다.

지역 선거라는 아수라장을 통과하지 않으니 지역구 출마에 비해 쉬운 길이지만 비례대표가 되는 셈법도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실력자와의 연분이 깊은 것 아니면, 비례대표가 되기 위해 전문성을 바탕으로 대중 속에서 유명세를 쌓는 것이 지름길이다. 썰전이란 방송 프로그램에서 쌓은 지명도를 업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이철희 의원이 대표적인 경우다.

비례대표 지망생들을 만나면 지금 단계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컨설팅을 요청해 온다. 그런 이들 대부분은 별다른 명성도 없고, 변변찮은 재산 상황, 빈약한 정치·정당활동 이력을 가진 장삼이사들이다. 우선 자신의 인적 네트웍을 점검해 보고, 도움이 될 만한 분들을 만나보시라고 돌려보내지만, 다음 국회에서 마주치게 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너도나도 비례대표가 되려는 이유는 지역구에 비해 쉽기 때문이다. 20대 국회를 보면 비례대표가 딱히 지역구 의원에 비해 전문성이 높지는 않았다. 여야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추진하는 이유는 현 제도가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디, 전문성이 실종된 비례대표제처럼 국민의 뜻이 실종된 제도가 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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