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1357년(공민왕6) 가을. 
이제현은 나라가 어려울 때 일수록 올바른 역사의식을 상하 모두가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역사를 서술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명분론과 정통론에 입각한 성리학적 춘추사관에 기반을 두었다.
‘원간섭기’에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사대를 합리화하고 피지배를 체념하는 현실주의 역사관에 매몰되어 있었다. 이제현은 이러한 풍토를 개탄했다. 그래서 암울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명분론과 정통론만이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이민족의 간섭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리하여 이제현은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기년(紀年)·전(傳)·지(志)를 지었다. 이제현은 제15대 숙종 때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하여 《사략(史略)》이라 이름 붙였다. 그는 철저하게 객관적이면서도 대의명분과 자주성을 잃지 않는 냉철한 필치를 유지하였다. 이 책에 시대의 귀감을 삼기 위해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흥하고 쇠퇴하는 대개(大槪)를 약술했다. 그러나 백문보는 예종·인종 두 조(朝)를 초했고, 이달충은 아직 마치지 못했던 것을 남천(南遷,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한 일) 때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358년(공민왕7) 정월.

이제현이 치사한 후 해가 바뀌었다. 조정에서는 개경성을 개축하려고 대신들 중에 나이 많은 이들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다. 이에 시중으로 치사한 이제현은 공민왕에게 글을 올려 아뢰었다.

“태조 왕건 대왕께서는 사방을 정토(征討)하시고 3국(후고구려,후백제,신라)을 통일한 뒤 7년 만에 훙서(薨逝, 왕의 죽음)하였사옵니다. 그 때 전쟁으로 상처 입은 백성들을 시켜 토목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 하여 송경(松京)에 성을 쌓지 않았사옵니다.  
현종 초년에 이르러 거란이 개경을 짓밟고 궁성을 파괴하였는데, 당시에 성곽이 견고하였던들 거란이 그토록 쉽게 궁성을 불 지르고 유린하지는 못했을 것이옵니다. 현종 20년에야 비로소 이가도(李可道)에게 명해서 개경에 성곽을 쌓게 하였습니다. 뒤에 금산왕자(金山王子)가 군사를 몰고 와서 서해도(황해도), 양광도(충청도) 등을 침략하고, 또 여고차라대(余古車羅大)가 황교(黃橋)에 둔병(屯兵)하였지만 개경에는 진입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성곽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하온즉 당연히 성곽을 개축해야 한다는 것은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이옵니다. 이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니 음양가의 의논에 꺼리는 것이 있더라도 한 번 정한 논의를 변경하지 않아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옵니다.”

공민왕은 이제현의 상소에 화답했다. 곧 바로 개경성의 개축이 시작되었다. 개경의 지형이 원의 군사에 노출된 점을 감안하여 도성에 외성을 세우는 작업도 병행했다.


제자 이색과 매화를 감상하다

유난히 춥고 긴 겨울이었다. 1세기 만에 볼까 말까 한 폭설이 온 세상을 억눌렀지만, 어느덧 입춘이 지나고 ‘대동강물이 풀린다’고 하는 우수·경칩도 지났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는지 꽃샘추위가 한동안 기승을 부리더니 오는 봄의 우중충한 하늘엔 가벼운 눈바람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해(1358년) 2월 초 어느 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중서문하성의 정4품) 이색이 퇴청하는 길에 이제현의 집을 찾았다. 다실(茶室) 앞 정원에 매화가 피었으니 보러 오라는 전갈을 보내지 않았는데 이심전심 이색이 찾아준 게 고마운 이제현이었다. 
“스승님,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목은(牧隱, 이색의 호), 어서 오게나.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잘 왔네.”
“스승님댁 정원의 매화를 감상하기 위해 발걸음을 하였사옵니다.”
“고맙네 그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아버님…….”
장지문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은쟁반을 구르는 구슬소리와 같이 청아했다. 이제현이 애지중지하는 딸 미경(박씨 부인의 셋째 딸, 나중의 혜비)이의 목소리였다.
“차상을 들이거라.”
“예…….”

이색이 범상한 자색을 갖춘 미경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이제현에게 물었다.
“미경 아가씨가 올해 몇 살이지요?”
“과년한 처녀의 나이는 알아서 뭣하려고. 벌써 열일곱이나 됐나 보네.”
“어디 혼사 자리라도 알아볼까 하고……요.”
“마음써줘서 고마우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문 밖에서 엿들었는지, 미경이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차상을 들고 들어왔다. 이제현은 정승을 네 번이나 지냈건만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다. 다만 차를 좋아하다 보니 차살림을 하는 다실만큼은 정갈하게 꾸며놓았다. 
정원이 바라보이는 위치에는 ‘다도무문(茶道無門) 난향죽풍(蘭香竹風)’이라고 쓰여 있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명필 행촌(杏村) 이암(李巖)의 친필 글씨였다. 다실 안에는 차를 담아 놓은 크고 작은 옹기그릇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으며, 편액 밑의 소나무로 만든 다기장(茶器欌) 안에는 이조년, 김륜, 박충좌, 안축, 최해, 이곡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다호(茶壺)가 예닐곱 개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이제현은 이색과 차상을 마주하고 앉은 후 다담(茶談)을 나누었다.  
“목은은 요즈음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성리학에 의거한 삼년상 제도를 작년 10월에 건의했는데, 금상께서 채택하여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이를 시행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사옵니다.”
“서남해안에 노략을 일삼던 왜구는 어떻게 되었는가?”
“양광전라도왜적체복사(楊廣全羅道倭賊體覆使) 최영 장군이 오예포(吾乂浦, 장연)에 침입한 왜구 4백여 척을 격파하고 백성들 사이에 영웅으로 추앙받기 시작했습니다.”
“잘 되었어. 내가 7년 전에 최영을 도부장군으로 발탁할 때부터 백전백승의 명장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네.”
최영이 대공(大功)을 세웠다는 소식에 흡족해 하고 있는 이제현에게 이색은 우울한 이야기를 했다.
“스승님께서 치사를 하시자마자 조정은 힘의 공백 상태가 생겼고, 금상은 성리학자 중심의 관료들의 힘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하여 보우 왕사를 중심으로 불교세력을 통하여 견제하려 하고 있사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세상도 인심도 고려의 운명도 봄은 왔건만 봄 같지 않아 안타깝네. 아무리 세상이 혼미해도 오는 봄은 막지 못하는 법이네. 아무리 세상인심이 흉흉해도 피는 매화꽃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지.” 
“스승님, 금상을 보좌해서 폐정을 개혁하고 부원배들을 일소하여 고려가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신 스승님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은 만세에 길이 남을 것이옵니다.”
“허허. 목은, 자네가 아부를 다하고. 못난 스승을 위로하는 말 일게야.”
“선천(先天)의 첫째 인연이 부자관계라면, 후천(後天)의 첫째 인연은 사제관계라 배웠습니다. 저나 저의 선친(이곡)은 스승님을 만나서 겨우 학문에 뜻을 세울 수 있었사옵니다. 스승님의 덕망과 학덕은 고려의 선비들을 감화시켰으며 시문은 고려를 넘어 저 넓은 중원을 드날렸사옵니다. 감히 스승님의 문하가 된 것을 일생의 광영으로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목은, 자네는 요즘 무엇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

“초나라를 ‘춘추5패’의 강국으로 만든 명재상 손숙오(孫叔敖)를 공부하고 있사옵니다. 영윤(令尹, 초나라의 최고 벼슬)을 무려 세 번이나 역임한 그는 영윤이 되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물러나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하옵니다. 스승님께서도 정승에 네 번이나 오르셨지만 언제나 물러날 뜻을 가지고 정사에 전심전력하셨사옵니다. 고려가 창업한 이래 명멸한 수많은 선비들이 영욕(榮辱)을 함께 겪었지만, 오직 스승님만은 욕(辱)이 없는 영(榮)을 누렸사옵니다.” 
“허허, 목은. 졌네. 내가 졌어. 자네는 오늘 아예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작정하고 온 사람 같구먼.” 
이제현은 단아하고 과묵한 약관 30세의 이색에게서 당찬 패기와 함께 유연한 경륜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고려를 이끌고 나갈 동량인 것을…….’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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