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김정아 기자/사진=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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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3. Treviso 근교 소도시로의 탈출

이웃 도시 베네치아에 밀려 존재조차 흐릿한 트레비소. 현지인들의 삶을 엿보고 소소한 일상에서 만족을 찾는 취향이라면 목적지로 제격이다. 16세기의 붉은 성벽 안에 숨어있는 트레비소는 베네토 주의 순수함을 그대로 품고 있다.   

성벽 안, 그들만의 세상

“예술과 역사와 물의 도시. 곳곳에 물길이 흘러 ‘작은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 트레비소에 가겠다고 마음을 정한 건 이 진부한 홍보 문구에 혹해서가 아니다. 단지 궁금했다. 사람들이 왜 이 도시를 주목하지 않는 거지? 베네치아에서 고작 40킬로미터 거리에다가 산타루치아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면 단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인데 말이다.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지명까지. 새로운 곳을 탐닉하는 이의 취향에 이런 궁금증은 불씨였다. 낯선 이방인을 만족시킨 장면은 16세기에 쌓아올린 성벽의 안쪽에 있다. 공간 그 자체뿐 아니라 과거의 시간까지도 꽁꽁 가둬둔 듯, 3천 명의 주민들만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들만의 세상이 존재했다. 지금 같은 21세기에 동화처럼 사자 조각이 새겨진 성문을 통과해야만 발을 디딜 수 있는 도시라니. 포르타 디 산 토마스, 포르타 디 산타 콰란타, 포르타 알티니아 등 1500년대에 지어지고도 건재한 성문들이 오늘날에도 도시의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다. 성 내부라고 해서 보행자 전용도로가 절대 아닌데도, 사람들은 걷거나 자전거만 유유히 타고 다녔다. 그것마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햇살을 잔뜩 머금은 트레비소는 마치 유화처럼 보들보들했다. 빛바랜 파스텔 톤의 건물들이 골목을 따라 눈앞에 차곡차곡 겹쳐 보이고, 시야를 훅 치고 들어오는 대단한 랜드마크는 없었다. 그저 낡은 주택들만이 고만고만한 키재기를 하는 모양이었을 뿐.
“여기가 트레비소의 중심 광장이고요, 이쪽에 있는 물길을 따라서 예쁜 풍경이 많습니다. 근처 야외 카페에 좀 앉아서 쉬시고요. 이쪽으로 가면 나무가 울창한 주택가가 나와요. 멋진 집도 구경하세요.” 트레비소 관광안내소의 직원은 종이 지도에 볼펜으로 휙휙 동그라미 3개를 그려줬다. 솔직히 처음엔 설명하기 귀찮아 한다고 여겼지만, 도시에서 하루를 보낸 뒤 나는 그녀의 안내가 매우 솔직하고, 또 적절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트레비소는 거창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곳이다. 그냥 작고 곱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별거 아닌 것에 한눈팔다 보면 어느새 미소가 지어진다. 어슬렁어슬렁 골목길과 물길을 탐방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휙 돌고, 노천카페에 앉아 카푸치노 한잔 마시며 햇볕을 즐기는 것이 여행자로서 이 도시에 제대로 스며드는 법이다. 

평화로운 물의 기운 

평일 한낮에 지켜본 트레비소는 평화로웠다. 첫인상이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었다면, 그다음에는 물이 보였다. 잔잔한 분위기는 아무래도 물의 기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탈리아 북부를 가로지르는 실레 강과 보테니가 강의 합류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트레비소에는 해자처럼 성벽을 빙 둘러 강물이 흐른다. 베네치아의 통치를 받던 14세기, 작은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파놓았던 수로도 여전하다. 규모나 그 수는 비교 불가해도 ‘작은 베네치아’라고 불릴 만한 정취다. 관광안내소 직원이 예쁘다고 추천해 준 동쪽의 더 밀스지역은 느리게 흘러가는 수로들과 그 위로 앙증맞은 다리들이 흩어져 있어 그림 같다. 오래된 목재 다리도 있고, 우아하게 장식된 철제 다리도 있고, 마치 건물처럼 튼튼하게 쌓아올린 벽돌 다리도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다리는 단연 폰테 단테다. 카그난 강의 지류가 성벽 안으로 흘러드는 길목에 있는 것으로 무려 단테의 <신곡>에서 언급되었다. 여기서 물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중세 시대의 세탁부들이 상류층의 빨래를 하기 위해 찾았다는 빨래터 부라넬리가 나오고, 그 근처에는 과거 어부들이 갓 잡은 생선을 배를 타고 와 팔았다는 이솔라 델라 페스케리아가 있다. 1856년부터 아예 섬 위에 터를 잡고 있으며, 요즘도 매일 어시장이 들어서 아침이면 시끌벅적하다.

베네토 주의 진짜 매력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주의 진정한 모습은 트레비소에서 관찰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웃 도시 베네치아와 달리 관광객에게 점령당하지 않아 훨씬 더 매력적이다. 대단한 관광지는 없어도 빵 굽는 냄새가 구수하게 날 때면 삼삼오오 빵집으로 모여드는 동네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대낮부터 선글라스 끼고 노천에서 와인 마시는 멋쟁이 할머니들 따라 한잔 하기에도 좋고. 무엇보다 어디에서든 2유로를 절대 넘기지 않는 커피와 와인 값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갑다. 단, 여행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시에스타’. 오후 1시 무렵이면 상점이며, 박물관, 성당할 것 없이 철저하게 문을 닫는다. 심지어 타바끼까지 영업을 멈춘다. 이때 버스 티켓이나 꼭 사야 할 물건이 있다면 난감해진다.

산책의 출발점은 예상대로 메인 광장인 피아짜 데이 시뇨리가 훌륭하다. 지리적 중심이자 도시의 영혼과 같은 곳. 광장 주변으로 부티크, 레스토랑, 카페들이 즐비하고, 여기서 뻗어나가는 길 위에 주요 건축물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11세기 건설한 시청사 팔라쪼 데이 트레센토, 여러 시대에 걸쳐 개축되어 온갖 스타일이 뒤섞인 건축미를 뽐내는 대성당, 과거 귀족들의 정치권력을 상징하는 로지아데이 카발리에리, 단테의 아들이자 역시 시인으로 활동했던 피에트로가 잠들어 있는 산 프란체스코 성당 등 유명한 건 없으나 무의미한 건물은 하나도 없다. 베네치아를 탈출해 무작정 찾아온 트레비소이지만, 티라미수와 프로세코와인만큼은 계획에 있었다. 티라미수는 1962년 이곳에 있는 레스토랑 알레 베케리에에서 탄생했다. 커피를 머금은 촉촉한 레이디핑거 비스킷과 부드러운 마스카포네 치즈가 조화로운 이탈리아 대표 디저트. 단, 알레 베케리에는 가격이 워낙 비싸다고 현지인들은 동네 아무 카페에서나 티라미수를 먹으라고 조언한다. 본고장에서 먹는 것으로 기분 내는 데에는 충분하고, 또 맛도 뒤지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발포성의 화이트와인 프로세코 역시 트레비소가 고향이다. 이 또한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와인 잔을 손에서 놓지 않는 동네 사람들의 틈에서 즐겨야 제대로다. 한 손에는 와인글라스를, 다른 한 손에는 생선이나 치즈를 끼워 넣은 샌드위치를 들고서. 어느 가게에서도 프로세코 와인 한 잔이 1.5유로를 넘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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