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가을바람 속에서 여의도는 삭발이 한창이다. 이언주 의원을 시작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고 있는 삭발 얘기다. 시작은 이언주가 했는데 그걸 공천이 불투명해 보이는 칠순의 박인숙 의원이 받고 난 뒤에는 삭발투쟁이 주창자보다 먼저 자유한국당으로 넘어왔다. 황교안 당대표가 삭발을 하고 난 뒤에는 아예 릴레이식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의원들이 나서 어느덧 10여 명이 삭발을 했다.

삭발의 계절을 맞은 여의도에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바야흐로 ‘나경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조롱이 아니다. 안타까워서 하는 얘기다. 정치가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한 인간을 이런 옹색한 문제로 궁지에 몬단 말인가. 나경원의 말이 맞다. 나 대표에게 삭발을 주문하는 이들 중에는 분명히 자유한국당의 삭발투쟁을 희화화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경원은 지금 당 안팎으로 삭발공세를 견뎌야 하는 입장이다. 당내에서는 태극기세력을 중심으로 한 극단적 주장을 일삼는 세력을 등에 업은 강경파들이 나경원의 삭발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퍼뜨리고 있다. 당 밖에서는 여권 지지세력들이 자한당의 삭발투쟁 효과를 반감시키기 위해 나경원의 삭발을 희화화하고 있다. 삭발로 얻을게 없는 나경원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나경원 대표가 살 길은, 아니 머리칼을 살리는 길은 삭발투쟁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국회 안으로 당을 끌고 오는 길뿐이다. 국회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는 원내대표 입장에서 국회를 멈춰 세우는 장외투쟁은 바람직하지 않은 투쟁방식이다. 삭발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장외로 나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원내대표가 설 자리는 좁아진다. 이미 삭발한 황교안 대표 입지만 다져지는 투쟁방식이다. 나경원 입장에서는 자기 머리칼을 잘라 황교안을 도와줄 이유가 없다.

삭발투쟁은 주로 민주화 이전의 야당 정치인이나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사용했던 저항수단이다. 자기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서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이끌어 내려는 목적으로 결행하는 투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이런 투쟁방식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더 이상 물러설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 꺼내든다. 110명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거대 야당이 무슨 대단한 궁지에 몰렸다고 삭발까지 하다 보니 곱지 않은 시각으로 비춰지고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황교안 대표가 삭발할 때까지는 그래도 민심이 나쁘지 않았다. 법무부장관에 국무총리까지 한 점잖아 보이는 야당 대표가 정치판에 와서 고생한다는 여론도 일었고, 황 대표의 굳은 결기를 대외적으로 내보이고 이완된 리더십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서 끝냈어야 했다. 과유불급이라고, 멈춰야 할 시점을 지난 삭발투쟁은 출구가 없어졌다. 나경원 대표가 삭발하거나 의원 전원 삭발이 아니면 마무리가 우습게 되어 버렸다.

황 대표 뒤를 잇고 있는 삭발이 당이나 대표에 대한 충정으로 비춰지지도 않고 있다. 공천 때문에, 공천 달라고 삭발하는 것을 짐작 못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연이은 삭발은 오히려 황 대표의 삭발을 국민들 기억에서 삭제하고 삭발한 사람 중 하나로 만들고 있다. 곱게 보일 리가 없다. 너도나도 삭발하다보니 황 대표 입장에서는 나중에는 누굴 공천 줘야 할지도 모를 판이다. 나경원 원내대표나 황 대표나 이쯤에서 멈추고 국회에 들어가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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