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끝없는 두 사제의 정담은 강물처럼 유장하게 흘렀다. 이윽고 달빛은 교교하게 방안을 들어와 비추고, 창문 너머에서 넘어오는 매화향기는 두 사람을 정원으로 나올 것을 충동질했다.
“매화는 청아한 달빛 아래에서 그 향기를 맡아야 제격이라네.”
“봄 달빛 아래 맡는 매화향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묘한 마력(魔力)이 숨어있사옵니다.”
“그렇지, 보름달과 매화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서로 비춰주고 있네. 달은 매화에게 월광을 보내고, 매화는 달에게 향기를 보내니 이름하여 매월상조(梅月相照)라 하지 않는가.” 
정원을 대낮처럼 밝히는 보름달 아래 매화 향을 맡자 이제현은 주흥이 도도하고 금방 시심(詩心)이 발동하여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시 한 수를 제자에게 읊어 줬다.

향 맑으매 일찍이 적화(摘火, 꽃따기) 전의 봄에 딴 잎이라네.
부드러운 빛깔은 아직 숲 아래 이슬을 머금은 듯
돌솥에 우우 솔바람 소리 울리고
오지사발에서는 어지러이 맴돌아 젖빛 거품을 토하네. 

이색이 스승의 시에 화답했다. 
“스승님의 시에는 벼슬살이를 떠난 성리학자의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있사옵니다. 한 잔의 차에 자족(自足)하는 스승님의 삶이 부럽사옵니다. 선비들이 누리는 최고의 풍류는 차살림이옵니다. 저도 후일 은퇴를 하면 스승님처럼 차살림이나 하고 매화나무 그늘 아래의 정취를 소재로 한시(漢詩)를 쓸 생각이옵니다.” 

이제현은 이색의 손을 잡고 정원을 함께 거닐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다시(茶詩)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시 한수를 이색에게 읊어줬다. 

주린 창자는 술 끊으니 메스꺼워지려 하고 
늙은 눈으로 책 보니 안개가 낀 듯하네.

누가 두 병을 말끔히 물리치게 할까
나는 본디 약을 얻어올 데가 있다네.
동암(東菴, 이진)은 옛날에 녹야의 벗이었고
혜감(慧鑑)은 조계산의 주지 되어 갔네.
빼어난 차 보내오고 아름다운 서찰 보내오면
긴 시로 보답하고 깊이 사모했네.
두 늙은이의 풍류는 유불(儒佛)의 으뜸이고
백년의 생사가 오직 아침저녁 같구나.

이제현이 몇 해 전에 차를 보내준 송광(松廣) 화상에게 답례하기 위해 쓴 시였다. 이제현은 이진과 함께 부자(父子)에 걸쳐 송광사 선사들에게서 차를 선물 받을 정도로 불교를 배척하지 않고 유불의 조화와 상생에 앞장섰다. 
이제현은 제자에게 줄 선물도 잊지 않았다.
“목은, 마침 원나라에서 가져온 화전춘차(火前春茶)가 조금 있으니 가져가서 달여 마시게.”
“고맙사옵니다. 차를 끓여 마시면 편견이 없어지고 마음이 밝아 생각에 그릇됨이 없어진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딸 미경이가 혜비로 간택되다

한편, 공민왕은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었다. 
벌써 즉위한 지 8년이 지났고 나이도 30세에 접어들었다. 노국공주는 공민왕 즉위년인 1351년부터 줄곧 봉은사·복령사·왕륜사 등을 찾아다니며 후사(後嗣, 대를 잇는 자식) 얻기를 기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왕실의 어른들 뿐만 아니라 명덕태후의 근심은 날로 깊어갔다. 
1359년(공민왕8) 정월 어느 날. 
명덕태후는 태후전에 아침 문후(問候)를 온 공민왕과 노국공주에게 당부했다.
“중전, 후사를 두지 못하면 왕실이 소란스러워지고 조정의 중심이 잡히지 않습니다. 명산대천에 후사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하겠어요.”
“예,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태후마마…….”
노국공주는 자격지심에 고개를 들지 못했으며, 옆에서 지켜보던 공민왕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결국 조정에서는 후사가 걱정이 되어 재상들이 앞일을 위해 노국공주에게 청했다. 
“중전마마, 아직껏 전하의 혈육이 없어 만백성의 걱정이 태산과 같사옵니다. 상감께 후궁을 두도록 진언해주시옵소서.”
노국공주는 속으로 언짢았으나, 국모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재상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조정에서는 명문가문의 딸 중에서 아들을 잘 낳을 만한 여자를 왕비로 들일 것을 공민왕에게 진언하였다. 

그해 3월 말. 
정계를 은퇴한 원로 이제현의 딸 미경이가 혜비로 간택되었다. 미경이는 이때 18세였다. 학문은 아버지 이제현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었고, 외모는 이마가 넓고 양미간이

좁지 않으며 입술이 붉은 빛이었고 엉덩이가 크고 신랑 될 공민왕 보다 키가 크지 않아 후비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초여름의 신록은 만월대에도 찾아왔다. 궁궐내 수목들은 앞 다투어 새순을 내고 몸치장을 하고 있어 오고가는 신료들의 마음까지 싱그럽게 했다. 이제현은 명덕태후 홍씨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고 입궐했다. 태후전을 방문한 이제현은 우선 하례의 말부터 올렸다.
“태후마마,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시중, 이번에 이 나라 왕실을 위해 경사를 베풀어 줘서 고맙습니다.”
“신의 집안에는 더없는 광영이옵니다. 그러나 미거(未擧, 철이 없고 사리에 어두움)한 여식이 자칫 왕실에 누를 끼치지나 않을지 그것이 염려되옵니다.”
“호호호. 당치 않아요. 따님의 인품이나 미색이 가히 국모가 되고도 남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황공하옵니다.”
“시중과 내가 사돈지간이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정말이지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망극하옵니다. 태후마마…….”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질 때에 이제현은 궁궐을 나섰다. 자비를 탄 이제현은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과연 미경이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인지, 이제현은 옷깃을 여미는 심정으로 연약한 딸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수철동 집으로 돌아온 이제현은 애지중지하는 딸 미경이를 사랑방으로 불러 말했다.
“아녀자에게는 네 가지 명예가 있다고 하였느니라. 알고 있느냐?”
미경이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유사덕지예(女有四德之譽)라 함은 첫째가 부덕(婦德)으로, 이는 반드시 재주가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절개가 곧으며 분수를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가 부용(婦容)으로, 이는 반드시 얼굴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아니고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것입니다. 셋째가 부언(婦言)으로, 이는 반드시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할 말 못할 말을 가려서 하되 말하는 자리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가 부공(婦工)으로, 이는 반드시 손재주가 뛰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고 매사에 부지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현은 흡족하고 사랑스런 눈빛으로 어린 딸에게 다시 일렀다.
“열 가지를 아는 것보다 한 가지를 행할 줄 아는 것이 참된 길을 가는 이치일 것이니라.”
“예, 아버님. 명심하겠사옵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