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의장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열린우리당의 차기 대권 주자이다. 비록 이번 총선 기간 중에 “60대 이상의 노인은 투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망언을 하여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별 일이 없는 한 가장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꼽는데 이견이 없다. 정동영 의장은 53년 전북 순창 생이다. 전주고와 서울대 국사학과를 나와서 MBC의 기자와 뉴스 앵커로 일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73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문화방송 LA 특파원을 지냈는데, 이때 큰 아들이 미국 분위기를 잊지 못해 현재 미국에서 유학중이다. 정동영 의장의 최대의 강점이 방송 앵커 출신다운 도회적 세련미와 깔끔한 대중성에 있다고 한다면 동시에 언제 터져나올지 모르는 ‘즉흥성’이 그의 최대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동영 의장 못지않게 당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김근태 원내대표는 47년 경기도 부천 생이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다. 그는 민주화 운동과 ‘고문 피해자’의 대명사이다. 민청련 의장을 지냈고, 민주화운동연합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이때 유명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고, 나중에 이를 공론화했다. 90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고, 95년 김대중 전대통령의 발탁에 의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로 제도권 정당에 들어왔다. 이후 재야 출신 세력의 중심으로서 항상 깨끗하고 청결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열린우리당이 분당되어 나올 때는 중립적 위치에서 최종 순간까지 분열을 막으려는 노력을 보였다. 하지만 김근태 원내 총무가 본격적인 대권 주자로 나서기에는 너무 약점이 많다.

이는 지난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과거 운동권 강성 이미지가 여전히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 대중성에 대한 콤플렉스로 반대로 ‘이라크 파병’이나 ‘FTA 문제’ 등에서 원칙을 포기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당내 입지도 정동영 의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어서 그가 넘어야 할 산은 높다.이부영 상임중앙위원은 나름대로 용꿈을 꾸고 있지만 아무래도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에 비하면 함량이 떨어진다. 42년 서울 생으로 용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 대변인을 역임하여 해직되었다.

75년부터 90년까지 국가보안법, 집시법,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5차례나 투옥되었다.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공동의장을 맡았다. 92년 김대중 전대통령의 도움으로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95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하지 않고 통합민주당에 남았다. 이후 97년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창당되자 한나라당으로 들어갔다. 2002년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중앙선대위 부위원장을 맡아 ‘반 노무현 전선’의 최전선에 선다. 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듯이 2003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참가한다. 신기남 의원은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고 하여 ‘탈레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52년 전북 남원 생이다. 경기고와 서울법대를 나와서 2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과 총무이사를 역임했다.

96년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정치권에 들어왔다.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과 이후 크고 작은 갈등, 그리고 이번 총선 과정에서 강력한 리더십과 추진력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어떤 조직이나 있기 마련인 내부 갈등과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화하고 융합시킬 ‘타협력’의 부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본격적인 대선 후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원칙’을 지켜나가되 수많은 분파와 타협할 수 있는 능력이 시급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강철 대구 시당 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다. 47년 대구 생이다. 계성고와 경북대 정외과를 나왔다. 73년 유신반대 시위 주도로 투옥되었다. 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개혁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고, 이후 영입추진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강철 후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원망과 비난을 받았다. 김두관 현 열린우리당 경남지부장은 노무현 인사의 가장 상징적 인물이다. 59년 경남 남해 생이다. 남해종고(현 남해 제일고)와 영주 경상 전문대학(현 경북 전문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동아대 정외과를 나왔다. 87년 남해 고현면 이어리 이장을 시작으로 95년부터 2002년까지 남해 군수를 역임했다. 그러다가 노무현 대통령 취임이후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젊은 나이에 일천한 학력과 경력으로 행정자치부 장관이 되었으니 소위 보수 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결국 작년 말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김두관 지부장도 용꿈을 꿀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난관이 너무 많다. 노무현 대통령의 후광은 여전하지만 과연 그 홀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김혁규 대통령 경제 특보는 노무현 대통령의 총선 ‘올인전략’으로 차출된 대표적 인사이다. 전형적인 김영삼 맨이었으나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39년 경남 합천 생이고 부산 동성고와 부산대 행정학과를 나왔다. 67년 경남도 총무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71년부터 ‘혁무역’이라는 회사를 통해 많은 돈을 벌었다. 이후 뉴욕 한인경제인 협회 회장과 뉴욕 한인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93년 김영삼 전대통령 시절 비서실 사정 1 비서관을 시작으로 93년부터 계속 관선-민선 경남도지사를 역임했다. 도지사 시절, 행정에 경영마인드 개념을 도입해 성공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돈독한 후원이 있지만 그 역시 전국적인 지명도는 떨어진다.김정길은 노무현 대통령의 평생 동지이다. 45년 경남 거제 생이다. 동아고와 부산대 정외과를 나왔다. 70년 부산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다. 84년 민추협 운영위원을 지냈고, 12대 민한당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90년 김영삼 전대통령의 ‘3당 합당’에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참가하지 않았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다. 96~97년 국민통합추진회의 상임집행위원을 지냈고, 97년 꼬마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통합 때 김대중 후보가 있던 새정치국민회의로 입당한다. 이후 <국민의 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과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낸다.

김정길 후보 역시 노 대통령의 평생동지로서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으나 전국적 지명도를 갖춘 대선 주자로 성장할 지는 의문이다. 유시민 의원은 색다른 차원에서 ‘태풍의 눈’이다. 그는 정동영 의장에 버금갈 만한 대중성을 갖춘 정치인이다. 당장 10만에 육박하는 노사모나 친위세력이 버티고 있고, 젊은 네티즌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는 59년 경북 경주 생이다. 대구 심인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독땄일에서 경제학으로 석사까지 땄다.

이 당시 쓴 그의 <항소 이유서>와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당시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80년 계엄 포고령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84년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2001년 문화방송의 <100분 토론> 진행자로 본격적인 대중적 정치인의 시작을 알렸다. 2002년 11월 <개혁 국민정당 대표 집행위원>을 맡고, 개혁당 간판으로 2003년 4·24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노타이 복장으로 국회에 들어가는 등 끊임없는 구설수와 ‘문화 충격’의 중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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