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1359년(공민왕8) 5월 병술일. 
새 왕비를 책봉하는 날이었다. 박씨 부인은 기쁨의 눈시울을 적시며 작별의 말을 입에 담았다.
“마마, 이제 입궁하오시면…….”
박씨 부인은 목이 메여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머니, 심려치 마오소서…….”
미경이의 목소리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버님께서도 자주 입궐하실 테니까 궁중 생활이 그리 외롭지는 않을 것으로 아옵니다.”
“어머니…….”
미경이는 왕비가 될 여인의 체모도 잊은 채 박씨 부인의 품에 안겨 어렵게 참았던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국모가 되실 분이 눈물을 보이시다니요. 의젓하셔야지요.”

마침내 미경이는 수많은 가족, 친척들과 하인종속들의 하례를 받으면서 대궐에서 보낸 찬란한 연(輦)에 올랐다. 이제현은 자비를 타고 따랐고, 뒤로는 호위하는 병사들과 상궁나인들이 걸었다.
수철동은 인산인해로 붐볐다. 백성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구경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경나온 사람들은 임금의 장인이 되는 이제현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지만, 대궐로 향하는 이제현의 심중은 백성들의 마음과는 달랐다. 머지않아 다가올 공민왕과 혜비의 불행을 미리 예측이라도 한 것일까.
왕비 책봉식은 정궁(正宮)인 연경궁(延慶宮) 내 전각인 경령전(景靈殿)에서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성대한 가례식이 끝난 후 이제현은 자신이 후임자로 천거한 문하시중 염제신의 인사를 받았다.
“경하 드리옵니다. 시중 어르신.”
“고맙소이다. 문하시중.” 
“어르신께서는 이제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가 되셨사옵니다.”
“나야 이제 정치를 떠난 몸. 국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소. 문하시중의 어깨가 어느 때 보다도 무겁소이다.”
임금의 장인은 분명 영광된 신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세를 풍미해 온 이제현은 국구가 되고서도 기뻐하지 않았다. 이제현은 신록으로 푸르른 송악산과 그 너머를 속절없이 흘러가는 노루처럼 생긴 흰 구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아, 혜비의 인생이 평탄할 수만 있다면…….’
이제현은 혜비의 영혼이 흰 구름이 되어 길 잃은 노루처럼 송악산을 헤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상념도 잠시 뿐, 이때 한림학사 이색이 다가오며 말했다.
“스승님, 오늘처럼 기쁜 날에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옵니다.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시옵니까?”
“아닐세. 어쩐지 마음이 허전함을 가눌 수가 없으니. 허허허.”
애써 웃고 있는 스승의 모습을 보고 이색은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국구가 된 스승님이 저토록 비감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고려 왕조에 혼조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혜비 이씨의 책봉의식이 끝났다. 이색은 한시름을 덜었다고 생각했지만, 스승의 기색에서 읽을 수 있는 어두운 그림자는 분명하였다. 그 연유는 공민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노국공주의 투총(妬寵, 시새움)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며, 공민왕은 노국공주 이외의 후궁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혜비의 성품이 노국공주의 투기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하지 못했고, 공민왕의 사랑을 쟁취할 정도로 집요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왕실의 종용과 신하들의 권유로 혜비를 들였지만 노국공주처럼 사랑하지 않았다.

한편 노국공주는 겉으로는 국모인양 의젓하게 행동했으나, 속으로는 여염집 아낙네처럼 질투의 화신이 되었다. 국모이기 전에 지아비를 사랑하는 한 여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노국공주의 눈치와 심기를 살펴야 하는 공민왕은 당연히 혜비를 소홀히 대할 수밖에 없었다. 
혜비는 날마다 몸단장을 곱게 하고 밤에는 공민왕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리는 임은 오지 않고 비련만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하루, 이틀, 사흘이 어느덧 한 달, 두 달, 세 달이 되어버렸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사랑하는 임, 공민왕이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로 들렸다. 
‘무심한 임금님…….’
이젠 기다릴 마음도 없었다. 몸단장을 할 기운도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허무함만 쌓여갈 뿐이었다. 

혜비가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는 친정뿐이었다. 이제현은 쓸쓸하고 적막한 궁중 생활이 싫어 친정 나들이를 자주하는 딸에게 그저 엄한 아버지로서 훈육할 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혜비마마, 친정 나들이를 삼가소서. 자주 출입하시면 조정에서 부덕(婦德)을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 궁중법도를 지켜 임금을 잘 섬기세요.”
“아버님, 법과 도리도 좋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정도 소중합니다. 친정에서조차 저를 이리 타박하시면 제가 마음 둘 곳이 어디에 있나이까?” 
“혜비마마,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보다 국모와 신자(臣子)의 사이가 더 중요한 법입니다. 어찌 도리를 잊으시려고 하십니까?” 
이제현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사랑하는 딸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자신이 밉기까지 하였다. 혜비는 부녀 사이의 정보다 법도와 도리를 앞세우는 아버지가 몹시 섭섭하고 원망스러웠지만, 그것은 그녀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비운의 여인 혜비. 그녀는 이제현의 14명의 딸 중 열째이며, 둘째 부인 박씨가 낳은 셋째 딸이다. 그녀는 후궁의 한적한 곳에서 독수공방을 해왔지만 이를 불평하지 않았다. 이는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으로 국모로서의 의젓한 부덕을 몸에 익혔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후사를 보기 위하여 혜비 이씨 외에 익비 한씨(왕의의 딸), 정비 안씨(안극인의 딸), 신비 염씨(염제신의 딸)를 차례로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노국공주는 혜비와 다른 후궁들에 대하여 심한 질투를 느끼어 식음을 전폐하고 들어 눕기도 하였다. 참소와 고자질도 다투어 일어났다.

혜비의 운명을 중심으로 공민왕 말년을 되돌아보자. 
공민왕 말기에 홍륜, 홍관, 한안 등 자제위(子弟衛)의 무리들이 익비를 강제로 욕보일 때에 혜비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여 따르지 않는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지만 이 때문에 공민왕은 그녀를 죽이려든다. 하지만 그녀의 절개가 워낙 대단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즉위 23년 만에 45세를 일기로 시역(弑逆) 당하자 혜비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 수가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