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망’이라는 말이 있다. ‘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이다. 극단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좌절감을 드러내는 말로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청춘들의 자화상을 잘 보여준다. 지금 국회에도 ‘이생망’ 못지 않은 좌절감이 쌓이고 있다. ‘이번 국감은 망했다’라며 ‘이국망’을 외치는 국회의원, 보좌진들이 넘쳐난다.

20대 국회 마지막 국정감사는 지난 2일부터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험난했다. 일정조차 쉽게 잡히지 않았다. 9월 30일이 10월 2일이 되더니 10월 7일까지 밀린다는 소문이 돌다가 급기야는 이번 국감을 하긴 하는 것이냐는 푸념이 그치지 않았다. 결국 10월 2일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국감을 준비해야 하는 국회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진이 다 빠져버렸다.

사람들은 ‘이미 그럴 것’이라 예상한 일이 벌어지면 참 허탈한 심정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번 국감도 ‘조국 국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 8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전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으로 지목한 이후에 대한민국은 두 동강이 나 버렸다.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도 바람 잘 날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조국 장관과 직접 연관된 상임위는 법무부를 관장하는 법제사법위원회다. 그 밖에 연관성이 있는 곳은 자녀들의 논문, 인턴 증명서 문제가 걸린 교육위와 사모펀드를 들여다볼 정무위, 연구윤리 문제가 다뤄질 과기방통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8월 이후 외교통상, 국방위, 환노위 정도를 제외한 모든 상임위에서 치르고 있는 ‘조국 내전’이 국감까지 연장되고 있다.

이번 국감이 조국 장관 문제로만 망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3일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은 광화문에서 보수대집결 집회를 열었다. 그 전 토요일에는 ‘검찰개혁’, ‘조국수호’를 외치는 여권 성향 시민들이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바야흐로 대한민굮은 ‘배달의 민족’을 넘어 ‘집회, 데모의 민족’으로 업그레이드되는 동안 국감은 잊히고 있다.

4일 방송통신위원회 국감에서는 서초동, 광화문 두 차례 집회 참여자 수 논쟁이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서초동에 200만이 모였는지, 광화문에 300만이 모였는지 검증하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의미도 없다. 이들 숫자는 정치적 당의정이 노골적으로 입혀진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하다. 방송통신 정책 점검과 상관없는 숫자가 국감을 망하게 하고 있다.

8개월 앞으로 다가온 21대 국회의원 선거는 국감을 망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이미 여러 의원실에서 국감은 제쳐두고 지역으로 내려갔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정감사는 남은 한두 명이 기본만 하는 것을 목표로 준비하고 실질적인 의정활동의 중심은 내년 총선에 맞춰진 의원실이 많다.

국회의원의 관심사가 내년 선거에 쏠려 있다 보니 국정감사를 준비하는 의원실마다 예년같은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국회의원 회관에서 밤을 새는 보좌진들의 퀭한 얼굴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복싱 동양챔피언의 의무방어전만큼이나 안타깝게 다가온다. 질의서 준비하는 중간중간 지역에 뿌릴 의정보고서를 제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국감은 망했구나 외칠 수밖에 없다.

흔히 국회에서는 국정감사를 추수라고 말한다. 올해 국정감사는 문재인 정부 3년, 20대 국회 4년의 가을걷이라고 할 것이다. 국정감사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20대 국회 마지막 국감이 맹탕국감, 조국국감에서 벗어나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우리에게는 아직 10여 일의 시간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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