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유석 조병옥 박사 뒤이어 47년만에 민주당 대표 등극 5선관록의 중진, 원리원칙·논리력 돋보여 소신정치인 ‘일순위’총선승리 막중 책임, 호남물갈이론·인적쇄신 등 과제 산적해민주당 새 대표로 선출된 조순형 의원. 5선 관록의 중진의원인 조 대표는 ‘미스터 쓴소리’, ‘미스터 바른소리’, ‘미스터 클린’ 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원칙주의자이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부친인 유석 조병옥 박사의 대를 이어 47년만에 민주당 대표 자리에 올랐다. 막판까지 접전했던 추미애 의원을 1천여표 차이로 제치고 조대표는 민주당 새 수장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시작은 이제부터다. 내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다.

조대표는 평소 논리력이나 성실성은 돋보이나 민주당을 이끌 정치적 리더십은 미지수란 평가를 받고 있다. 다섯 번 국회의원을 했지만 항상 비주류였던 조대표. 그런 그가 주류의 한복판에 서 있다.전당대회가 치러지기 전 이미 조대표의 1위는 예고돼 있었다. 추의원과 1·2위 경쟁을 할 것이라는 ‘평범’한 예상 속에서도 조대표가 1위를 할 것이라는 게 지배적 분위기였다. 이러한 예상은 적중됐다. 결국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찌감치 조대표는 전직 지도부인 한화갑 전 대표와 박상천 전 대표의 암묵적 지지를 얻었고, 정균환 원내총무도 이에 가세했다. 당내 ‘큰 손’들은 개혁성향이 강한 추의원보다 안정적 개혁을 강조하는 조대표의 손을 들어 줬다. 민주당 대의원들도 분당사태의 후유중을 조속히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조대표를 선택했다. 조대표는 21.4%를 얻은 추의원을 10%차로 누르고 안정적 승리를 이뤄냈다.

‘조순형호’의 출범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과 더욱 첨예한 대결구도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호남과 DJ의 영향권 아래 있는 민주당이 서울출신의 비호남권 대표를 간판으로 내세움에 따라 전국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조 대표는 50∼60년대 야당 지도자였던 유석 조병옥 박사의 3남으로 태어났다. 작고한 조윤형 전 국회부의장이 둘째형이다. 민주당은 부친인 조병옥 박사와 형인 조윤형 전국회부의장의 피와 땀이 배어 있다. 그래서 조대표는 누구보다 당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추의원 등과 함께 중도파를 규합해 분당을 막는데 적극 나섰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조대표는 제 11대때 국회의원이 됐다. 13대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국회의원 활동을 해온 5선 중진의원이다.

하지만 그는 늘 야당정치인을 고집해 왔다. 여당에 몸담으면서도 그는 여당속의 야당의원이었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만을 고집스럽게 걸어 온 그다. 조대표의 강직한 성품은 성장과정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대표는 1919년 3·1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가 만세를 주도했던 곳인 충남 천안의 병천에서 조병옥 박사의 3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조인원씨와 숙부 조병호씨는 당시 이 지역에서 만세를 주도한 공로로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조부인 조인원씨는 일본경찰이 쏜 총알을 맞은 상태로 끌려가 3년을, 숙부는 1년을 복역했다. 3·1 운동 당시 미국 유학 중이었던 부친 조박사도 광주학생 수양동우회 신간회 사건으로 장기간 복역했다.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성장한 탓인지 조대표의 젊은 시절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서울 돈암초등학교, 서울중·고교를 나온 조대표는 1954년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서울법대를 중퇴하고 58년 미국 워싱턴 D. C에 있는 조지워싱턴대 외교학과에 유학했다. 부친 조박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서울법대에 복학, 64년에 졸업했다. 서울대를 10년만에 졸업한 것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 조의원은 8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양김씨의 후보단일화에 앞장서면서부터. 당시 박찬종 홍사덕 이철 김정길 강삼재 등 소장파 의원 10여명과 함께 동참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후보단일화 실패와 대선패배의 책임이 있는 양김씨의 대안세력으로 한겨레 민주당을 창당해 ‘3김청산’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제 13대 총선을 치렀지만 4등을 하고 말았다. 당시 조대표는 후보단일화 운동을 함께 했던 동료의원들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껴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결심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2년후인 90년초 3김씨간 3당합당이 이뤄지면서 조의원은 다시 정치권으로 불려 들어왔다.

이후 YS의 3당 합당행을 거부한 김상현,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씨 등과 손을 잡고 ‘꼬마 민주당’을 창당한 뒤 야권통합위원장을 맡아 91년 7월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과 합당했다. 97년 대선때 김대중 정권이 출범했지만 조대표는 여당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신당(새천년 민주당) 창당의 당위성에 제지를 가했고, 김현철씨 사면을 유보할 것을 건의하는가 하면, 내각제 개헌 포기 등에 대한 대국민 사과, 특검팀 도입 등을 요구하면서 DJ정권 인사들과 잦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조대표는 언론과 시민단체, 피감기관이 뽑는 국감스타 1위에 자주 뽑혔다. 지구당보다 의회를 중요시해야 한다는 의회중심적 의정활동 때문이다. 평소 소신과 품위가 있는 의정활동으로 정치인의 귀감이 되는 국회의원에게 주는 제1회 백봉 신사상을 받았고, 시민단체로부터 ‘바람직한 의원’으로 뽑혀 양복 한 벌을 선물 받기도 했다.

조대표의 부인은 중견 연극배우인 김금지씨다. 김씨를 만난 것은 대학졸업 후 시작한 사업이 실패한 이후 삼성물산에 재직할 때였다. 당시 김씨는 국립극단 소속 연극배우로서 당시 모여성잡지의 포토스토리 주인공에 출연했는데, 후배 사진작가가 작업하고 있는 사진을 보고 소개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만나 30여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인 김씨도 남편의 강직한 성품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후문. 내년 총선까지 민주당을 이끌 새 대표로 조의원이 선출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조대표 홈페이지에는 많은 축하와 격려의 글들이 올라왔다. ‘대국민환영’이란 아이디의 한 네티즌은 “지역감정을 넘는다는게 별게 아니다. 민주당이 걸출한 이쪽 저쪽도 치우치지 않고 정도의 길을 가는 인물을 내세우니 우리 같이 손잡고 민주당을 호남에서도 영남에서도 사랑 받는 건전한 수권정당으로 키워 나가자”는 내용의 글을 올렸고, ‘전라도아리랑’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평소 조순형의원님의 튀지 않으면서도 뿌리깊은 나무같은 흔들림없는 모습이 좋아서 였습니다. 대선출마도 하셨으면 민주화세력들을 지역한계에서 벗어나게 하고 소장층과 노장층을 아우르게 하실 유일한 분이었을텐데 아쉬웠습니다. 이번 어려운 민주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위기에서 구해주시길 바랍니다”는 글을 올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민주당호’의 새 ‘선장’이 된 조대표가 과연 분당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민주당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조 대표는 총선 때까지만 권한을 유지하는 과도 체제의 수장으로서 열린우리당은 물론 한나라당과의 경쟁에서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당내 정비가 급선무다. 가장 큰 난관은 호남물갈이론. 세대교체론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어떤 식으로든 인적쇄신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인적쇄신론에 저항하는 호남 중진의원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풀어가야 한다.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설정도 중요한 문제다. 조 대표는 노 대통령의 ‘배신’을 강조하면서 ‘총선 심판론’을 제기하고 있다. 열린우리당과의 공조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미 문을 닫아 놓은 상태다. 평소 조대표 스타일로 볼 때 연합공천 등의 공조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는 게 일반적 전망이다. 조대표의 원리원칙적인 강직한 성품이 한 정당의 수장으로서 어떤 식의 조화를 이끌어낼지 흥미로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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