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혜비 이씨가 후궁이 된 그해(1359년) 가을 어느 날. 
우사간 이보림(李寶林, 이서종의 아들)이 남원부사로 제수되어 인사차 할아버지 이제현을 찾아 문안을 올렸다. 이제현은 5년 전에 과거에 급제해서 목민관으로 부임하는 장손(長孫)에게 두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공(周公)은 위로는 요순(堯舜)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공맹(孔孟)을 열어준 중국 전통문화의 선구자였지. 주공은 형인 무왕이 죽은 뒤 어린 조카인 성왕을 섭정(攝政)하여 정무를 보살폈는데, 봉지(封地)인 노나라에 장남 백금(伯禽)을 대리로 부임시켰을 때 아들에게 “나는 어진 사람의 방문을 받으면 머리를 감다가도 그것을 쥔 채로 나가서 맞이하고, 밥을 먹다가도 그것을 뱉고 나가서 맞이한다(吐哺握發 토포악발)”고 훈계했다.
또한 황석공은 소서(素書)에서 “박하게 베풀고 후하게 바라는 사람은 보답 받지 못하고(薄施厚望者不報 박시후망자불보), 신분이 귀하게 되고서 천했던 때를 잊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한다(貴而忘賤者不久 귀이망천자불구)”라고 경계했다. 
이처럼 이제현은 손자에게 유능한 현인의 소중함을 알고 예로써 선비들을 대해야지 목민관이라고 해서 결코 오만하게 굴어서는 안 되며, “심은 대로 거둔다(種豆得豆 종두득두)”는 속담처럼, 형편과 처지에 따라 사람이 달라진다면 군자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홍건적(紅巾賊)의 침입과 몽진(蒙塵), 그리고 개경탈환

원나라의 쇠락은 고려에 두 가지 영향을 끼쳤다. 
하나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족과의 전쟁이었다. 원나라는 ‘원간섭기’ 97년 동안 자주국 고려가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지 못하게 압력을 넣었다. 그리하여 1356년 원나라의 세력을 몰아냈을 당시 고려는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하였다. 원나라의 보호 아래에서는 고려의 군사적인 취약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한족들의 반란으로 대륙의 정세가 급변하자 고려는 외부 세력의 침입을 당하게 된 것이다.
홍건적(紅巾賊)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두 차례 침입해 고려를 초토화시켰다. 홍건적은 한족 반란군의 선봉으로 한산동(韓山童), 유복통(劉福通) 등이 중심이 되어 하북성 영평(永平)을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쳤다. 그들은 머리에 붉은 두건(頭巾)을 둘렀다고 해서 홍건적이란 이름이 붙었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인솔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대북벌을 개시하여 초반에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이 좌절되면서, 홍건적 일부 세력들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359년 주력부대가 주둔하던 변량(개봉)을 다시 원나라에 뺐기면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홍건적은 요양과 심양 일대의 고려 유민들과 물자를 이용하여 재기하고자 했지만, 고려 유민들은 홍건적을 거부하고 고려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고려 조정은 이들을 서북면에 정착시켜 서북 지방의 방어력 강화를 꾀했다. 당시 홍건적은 안정적인 세력 기반을 갖지 못한 채 식량과 물자를 현지 조달에 의존했기 때문에 보복과 물자 확보를 위해 고려로 침공하게 된 것이다.1357년(공민왕6) 8월.
고려 조정에서는 원에 왕래하는 사신들이 입수한 정보를 분석한 결과, 당시 원나라는 내부 사정의 어려움으로 홍건적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할 것이며, 홍건적의 일부 세력이 고려에 침입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둘러 방어대책을 수립, 안주와 서경을 중심으로 한 청천강 이 남 지역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홍건적의 남진(南進)을 저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 후 1359년에 이르기까지 2년 동안 홍건적은 고려에 침공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서북계 일대에 배치된 고려군의 방어태세도 자연히 느슨해졌다.
1359년(공민왕8) 12월 초순. 
홍건적의 한 괴수인 모거경(毛居敬)이 4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가로질러 노도처럼 밀려왔다. 이것이 ‘홍건적의 제1차 침입’이다.
이들은 기병(起兵)의 명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고려를 회유하였다.“우리는 백성들이 오랑캐 원의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을 가엾이 여기고 군사를 일으켜 중원(中原)을 회복하였다. 동쪽으로는 제와 노, 서쪽으로는 함곡관과 진, 남쪽으로는 민중과 관동, 북쪽으로는 유주와 연주 지방에서 모든 백성들이 지성으로 우리에게 의지하며 마치 굶주린 자가 산해진미를 얻은 듯, 병든 자가 좋은 약을 만난 듯 기뻐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군사들에게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하여 귀화하는 자들은 위무해 주고 있으며, 거역하는 자들은 그 죄를 다스리고 있다.”12월 8일. 홍건적은 평북 의주를 함락시키고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와 의주 주민 1천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2월 9일. 홍건적은 물밀듯이 쳐내려와 의주 남쪽 25리 지점의 정주(靜州, 의주군 고성)를 함락시키고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살해했다. 압록강 연안지대가 모두 홍건적의 말발굽에 짓밟힌 것이다. 정주를 점령한 홍건적은 곧 바로 남하하여 의주 남쪽 35리 지점의 인주(麟州)를 일거에 함락시킨 후 철주(鐵州, 철산)로 진군할 테세를 갖추었다. 이후 홍건적과 고려군은 압록강과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12월 12일. 홍건적이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다는 장계를 받은 공민왕은 그 대책으로 방위군의 지휘부를 편성했다. 수문하시중 이암(李巖)을 총사령관격인 서북면도원수로, 경천흥을 부원수로, 김득배를 도지휘사로, 이춘부를 서경윤으로, 이인임을 서경존무사로 임명하여 북쪽으로 급파했다. 이암은 물밀듯이 쳐내려오는 홍건적을 막으라는 조정의 명을 받았지만 눈물을 머금고 서경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더럭 겁도 나고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청야전술(淸野戰術)을 구상했다.  청야전술은 주변에 적이 사용할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살수대첩(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을지문덕 장군이 수양제의 정예군대 30만 5천 중 2,700명만 살려 보낸 대승을 거둔 바로 그 전술이다. 
이암은 청야전술을 쓰기로 결정하고 군령을 내렸다.
“홍건적이 사용할 수 있는 식량 및 물자를 모두 불태우라.” 
그러자 호부낭중(戶部郎中) 김선치(金先致)가 반대하고 나섰다.
“청야전술은 오히려 적을 더 깊숙이 끌어들이는 결과를 빚을 것입니다. 홍건적의 목적은 물자 확보에 있습니다. 따라서 물자들을 그대로 놔둬서 홍건적에게 물자를 내주게 되면 그들의 남진을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고려군은 황주 일대로 퇴각하여 전열을 정비해야 합니다.” 
“으음, 그대의 계책이 일리가 있구나…….”
김선치의 건의에 따라 청야전술을 거두고 반대로 물자를 주는 전략은 적중했다. 홍건적은 20일 만에 서경(평양)에 무혈입성한 후에 더 이상 남진하지 않았다. 이로써 고려군은 전력을 집결시켜 전투 준비를 갖출 시간을 벌게 되었다.
공민왕은 이암이 겁이 많아 지휘를 못함을 알고 평장사 이승경(李承慶)이 지휘하게 했으며, 전임 찬성사 권적(權適)에게는 승병을 거느리고 전방으로 나가게 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