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원에서 진료를 하다 보면 다양한 환자들과 마주한다. 오늘 소개할 환자는 매주 2회씩 의무적으로 한의원에 출석하는 63세 여성 김모씨다. 그녀는 과거 요양보호사로 근무하는 동안 심한 어깨통증으로 어깨와 등 전체에 사혈부항(피를 뽑는 부항)을 두 번 시행하고 완치되었다. 그 후로부터 한의원에 침 치료보다는 주기적으로 나쁜 피를 뽑기 위해 찾아오는 소위 ‘사혈 매니아’ 된 것이다.

그런데 지난주였다. 그 날 따라 허리, 종아리, 사타구니, 팔꿈치, 어깨에 펜으로 잔뜩 표시해 와서 “여기 죽은 피 좀 빼 줘요.” 하며 사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자그마치 어림으로만 30군데는 넘어 보였다. “아유 어머님, 이렇게 많이 피 뽑으면 큰일 나요. 어머님 아프신 건 다 이해하지만 오늘은 어깨랑 허리만 피 뽑고 다른 곳은 침으로 치료해 드릴게요!” 라고 말씀을 드리고 치료를 했지만 그녀는 무언가 만족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문제는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그녀의 보호자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어제 밤부터 몸이 무겁고 열이 나는 것 같고 기운이 없으며 입술이 떨리고 가슴이 벌렁거리며 귀에서 소리까지 난다고 했다. 침을 맞은 부작용이 아니냐는 보호자의 말에 나는 침을 맞고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설명하며 일단 내원해 환자의 상태를 보자고 권유했다. 그의 맥을 짚으니 피가 부족한 허혈(虛血) 상태가 과하여 음(陰)을 손상시킨 세삭(細數)맥이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피가 부족해져서 생긴 증상 같습니다” 하고 어제 치료했던 환부를 보자고 하니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보여줬는데, 역시나 어제 사혈부항을 뜨지 않았던 곳을 포함해 온몸에 피멍이 들어있었다. 어제의 진료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근처 찜질방 아는 지인에게 또 사혈을 하러 갔다고 털어놓았다. 그제서야 사혈을 너무 과하게 하고 난 후유증으로 확진하고 피를 보충하는 첩약을 일주일 치 처방하여 현재는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으나 아직은 전신근육의 경련과 피로감 등의 후유증은 남아 있는 상태다.

한방에서 어혈(瘀血) 이라는 개념은 정상적이지 않은, 생리적 기능을 상실한 혈액이 응결되어 형성된 병리적 산물로 여러 병인 중 하나이다. 

어혈은 크게 외부적 타박 또는 교통사고로 인한 충격인 외인성과 부인들의 자궁질환(근종, 생리통, 월경불순)과 약물의 과다복용, 혈액순환 장애 등으로 인한 내인성으로 구분된다. 문제는 이렇게 김모 여성뿐 아니라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자신의 몸 어디에 문제만 생기면 ‘어혈’ 혹은 ‘나쁜 피, 죽은 피’ 가 있어 병이 생겼다고 자가 진단한다. 그리고 피를 뽑는 사혈부항을 통해 어혈을 빼야만 병이 낫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타박으로 인해 겉으로 멍이 눈에 보이는 어혈이나 국소부위의 어혈은 구분하기 쉽다. 이런 경우는 피를 뽑는 사혈부항요법을 통해 피부에 음압을 작용하여 직접적으로 국소부위의 어혈을 뽑아 제거하고 혈액의 산소-이산화탄소 가스교환을 증진시켜 신진대사를 활성화시키고 혈액순환이 잘 되어 면역이 높아질 수가 있다.

다만 어혈이 생긴 지 오래되어 범위가 처음부위와 달라진 경우 혹은 범위가 늘어난 경우는 육안상 멀쩡하고 진단검사상 이상이 없으니 어혈을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게다가 아픈 부위가 김모 여성의 경우처럼 한두 곳도 아니고 수십 군데일 경우 모든 부위를 사혈할 수도 없다. 이러한 경우는 대부분 시간이 경과하여 어혈이 온몸에 퍼져 버리거나 근육 또는 더 깊숙한 관절, 뼈까지 침투해버린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피를 많이 뽑는다고, 자주 뽑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어혈을 제거하는 약물을 이용해 배출시키는 방법을 마땅히 사용해야 한다.

또한 어혈로 인한 증세가 아닌데도 ‘어혈 때문이야’ 하고 진단하는 환자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의 환자들은 본인의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에 ‘예전에 이렇게 아팠을 때도 피 뽑고 시원했다’라는 근거로 본인의 증상을 어혈로 자가진단하여 의사에게 사혈을 주문하는 경우가 가장 위험하다. 

실제로는 어혈로 인한 병이 아닌데도 사혈을 하는 경우 불필요하게 정상적인 피를 뽑게 된다. 앞서 예로 든 여성의 경우처럼 사혈의 정도가 심한 경우 오히려 중대한 신체적 위해를 주게 된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고 의사의 말을 신뢰해야 한다.

특히 나이가 많은 노인, 마르고 체력이 약한 사람, 생리 중인 여성들은 혈허(피가 부족함)하여 사혈부항을 과하게 하는 경우 허혈(虛血)증세인 피곤함을 유발한다. 또한 아스피린 복용으로 출혈 시 피가 잘 멈추지 않는 사람들도 사혈부항을 하게 되면 과다출혈이 올 수 있으므로 사혈부항 시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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