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앞에서 자기 소개를 한국어로 하고 있는 척 넌리

“안녕하세요. 저는 척이에요. 저는 미국 사람이에요. 저는 수학 교수예요.”

현직 대학교 수학 교수인 척 넌리(59). 구강 구조와 발음 체계가 영어와 다른 한국어임에도 그의 한국어 발음은 비교적 정확하다. 한글 모음과 자음 익히기는 이미 끝냈고, 지금은 웬만한 한글은 척척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척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 거의 모두가 척 수준만큼 한국어를 구사한다.

학생들의 직업은 교수, 교사, 비서, 약사 보조, 소프트웨어 판매원, 고교생 등 다양하다. 직업만큼이나 연령대도 1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특정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이들은 한국어 습득과 함께 한국 문화도 자연스럽게 접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건 기본. 방탄소년단(BTS)의 노래가 철학적인 것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오클라호마에서 한국어 보급에 땀흘리고 있는 켈리 김 씨

이 모두가 한국어 보급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교포 켈리 김(한국명 조광희) 씨가 있기에 가능하다.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북쪽으로 3시간 정도 자동차로 달리면 나오는 오클라호마주의 주도 오클라호마 시티. 오클라호마는 미국프로농구(NBA) 오클라호마 썬더의 연고지이고 한국의 SK가 셰일오일을 직접 생산하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만 명의 한인이 살고 있어 코리아타운까지 형성되어 있는 달라스와는 달리 오클라호마 시티는 아직 한인 수가 그리 많지는 않다.

한국어가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들을 중심으로 많이 보급돼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김 씨는 오클라호마 내 한국어 보급을 위해 글자 그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셈이다.

외국인을 위한 영어교육(TESL)을 미국 대학원에서 전공한 김 씨는 오클라호마 주정부가 운영하는 오클라호마 시티 커뮤니티 칼리지(OCCC) 부설 ESL에서 영어가 부족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매주 토요일에는 한글학교에서 한인교포 어린이들과 한글에 관심 있는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오던 중 입소문을 통해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미국인들의 수가 늘어나자 OCCC 측과 상의한 끝에 지난해부터 한국어 강좌를 정식으로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올해 세 번째 학기를 진행하고 있는 김 씨는 학생 수가 늘어나자 한국어1, 한국어2 등 수준별로 반을 나누어 수업을 하고 있다.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자 김 씨는 ELS 영어 강의를 중단하고 한국어 수업에만 전념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어 개설이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OCCC 케피털 힐 센터 디렉터 그렉 마일스

 

한국어 강좌 개설에 적극적이었던 그렉 마일스 OCCC 캐피털힐 센터 디렉터는 “김 씨가 먼저 제의해왔다. 수요가 있는 만큼 과감하게 개설했다. 김 씨의 열정과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에 한국어 개설은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일스는 “지금은 이중언어의 중요성이 어디서든 강조되는 시기이니만큼 앞으로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도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김 씨의 지난 1년간의 열정에 대한 보람은 그에게서 한국어를 배운 학생들의 ‘한글 찬양’에서 흠씬 묻어나온다.

 

10월22일 한국을 여행하는 고교생 비 라이트

한글의 모양과 소리가 너무 예쁘다거나, 아직은 완벽하지 않지만 한국 드라마를 영어 자막 없이도 조금씩 이해하며 볼 수 있게 됐다는 말을 들을 때다.

김 씨는 또 요즘 오는 10월22일부터 일주일간 한국을 여행할 한 학생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아빠에게서 일종의 수학여행 선물을 받은 12학년(한국의 고교3학년) 비 라이트가 그 주인공으로, 김 씨는 그에게 한국어는 물론이고 한국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등 한국 여행이 처음인 라이트가 한국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주고 있는 것.  

BTS의 열성팬이라는 그는 비록 짧은 일정이지만 가능한 많은 곳을 다니며 한국의 문화를 체험하기를 원한다. 이참에 김 씨에게서 배운 한국어 솜씨도 한국 원어민 앞에서 뽐내볼 참이다. 김 씨가 뿌듯해 하는 이유다.

라이트는 김 씨가 가르치는 학생 중 한국어 발음이 가장 좋다. 얼굴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으면 한국인 뺨친다. 즐기면서 배우니 한국어도 쉽게 느껴진다는 그는 한국 여행을 목전에 두고 김 씨에게서 개인과외를 받을 정도로 한국어 습득에 적극적이다.

 

한국 관련 다큐멘터리를 꼭 찍어보고 싶다는 멜리사 벨라스코(맨 왼쪽)

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게 되는 계기는 최근 불고 있는 한류의 영향에서부터 문화적, 의학적, 언어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OCCC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 멜리사 벨라스코는 한국어가 영어와는 또 다른 소리글자라는 점에 매력을 느껴 인터넷을 검색한 끝에 김 씨 강의를 찾은 학생이다. 한국어를 영어처럼 할 수 있는 날엔 한국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겠다고 한다.

홍콩인과 결혼한 제니퍼 챈은 한국어에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가 깃들어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어에 끌린 케이스.

수학 교수인 넌리는 이중언어를 하는 사람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적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임에도 한국어 보급을 위해 땀을 쏟고 있는 김 씨에게는 두 가지 포부가 있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한국어가 대학교 정식 크레딧 과목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 목표다. 또 오클라호마 공립 초중고에 한국어가 정식 외국어로 채택되게 하는 것이다. 김 씨는 다만, 한국어 교육에만 올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앞으로 이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는 솔직한 심정도 피력한다.

김 씨에게서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는 미국인들. 다음에 만나면 영어 대신 한국어로 인터뷰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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