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으로 고교졸업후 집안 농삿일 돕다 뒤늦게 대학 진학95년 고향 남해서 최연소 기초단체장으로 군수출마 당선경남도지사 낙선후 대선때 노무현 후보 캠프합류로 인연인생역정·정치스타일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리틀 노무현’별명 얻어“9월 3일은 대의민주주의를 남용한 치욕적인 날로 한국 정치사에 기록될 것이다.” 지난 5일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이 한나라당을 겨냥해 날린 직격탄이다. 3일 해임안을 가결시킨 한나라당에 대해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김 장관의 이러한 의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노 대통령은 7일 청와대 춘추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번 해임건의는 정말 부당 횡포다”라며 “받더라도 호락호락 받아들이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국감이 끝날때까지’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야당의 조속한 해임안 수용 요구를 사실상 거부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대통령을 직접 상대로 한 전면전을 선포하는 등 강력한 대여투쟁 방침으로 맞서고 있다.

김 장관의 거취문제가 가을정국 최대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또 참여정부 출범초 시골 이장출신으로 최연소(44세) 장관에 발탁돼 화제의 주인공이 됐던 김 장관은 또다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정·관계에서는 김 장관을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시골 마을 이장 출신으로 지방행정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장관직에 올랐기 때문이다.일반인들은 단지 김 장관이 이장 출신이고 젊은 나이에 장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에만 주목하고 있지만 그의 행정이력은 결코 짧지 않다. 또 나름대로 독특한 행정 노하우와 뚝심있는 정책 추진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노무현 대통령과 동향인 김 장관은 경남 김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환경은 매우 어려웠다. 보충수업비를 내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과 싸우며 유년기를 보냈다.간신히 남해종합고(현 남해제일고)를 졸업한 그는 등록금이 없어 대학진학도 포기해야 했다.

고교 졸업후 집안 농삿일을 도왔으나 농삿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걸 깨닫고 영주경상전문대(현 경북전문대) 행정학과에 입학, 81년 졸업했다.24세때 동아대 정외과에 재입학한 그는 민주화운동 투쟁 대열에 합류, 서울민주통일민주운동연합 간사로 활동하면서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이때부터 지방행정에 많은 관심을 보여온 김 장관은 87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낙향했다. “사회변혁은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는 신념아래 지방행정의 초석을 다지고자 남해로 귀향했던 것.남해농민회 사무국장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한 그는 3년간 이어리 마을 이장, 남해신문 편집인 등을 역임하면서 늘 주민들과 함께하는 자치행정 노하우를 키워나갔다. 이러한 노력덕에 그는 95년 민선1기때 전국 최연소 기초자치단체장(남해군수·당시 37세)에 당선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민선 군수 시절에는 기자실 폐쇄 등 톡톡 튀는 정책을 밀어붙여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민선 1, 2기 군수를 연임한 그는 지난해 6·13 지방선거때 군수직을 사임, 경남도지사직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비록 광역단체장 꿈은 좌절됐지만 그는 노 대통령과의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는 계기가 됐다. 경남도지사에 도전장을 내밀 당시 그는 “’노풍’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소신을 가지고 민주당을 선택했기 때문이다.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노 대통령은 김 장관에게 세번이나 전화를 걸어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젊은 인재를 얻기 위해 삼고초려를 했던 것.노 대통령과 김 장관의 첫 인연은 지난 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 대통령은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해 지방 연구기관과 단체장들을 네트워크로 묶는 작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여러차례 공식석상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김 장관을 ‘모범적인 지방행정가’로 극찬했다는 후문이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노 대통령이 대선때 지원요청을 하자 김 장관은 기꺼이 경남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노풍’ 확산에 전력을 다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장관이 참여정부 첫 내각에 최연소로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노 대통령과 김 장관의 이러한 인연이 작용했을 것이란 시선을 보내고 있다.하지만 노 대통령의 정치 철학과 인사스타일을 가까이서 지켜본 측근들은 노 대통령이 사사로운 인연 때문에 김 장관을 발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다만 노 대통령과 김 장관이 걸어온 인생 역정이나 스타일이 비슷하다는데는 정치권 관계자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모두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학비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한 쓰라림도 함께 체험했다. 87년 6월 항쟁과 농민운동에 참여한 김 장관의 사회활동 경력도 노 대통령과 닮았다. 김 장관이 남해군수 시절 청사 기자실을 없앤 것도 노 대통령의 언론개혁 구상과 비슷하다.노 대통령의 한 핵심측근은 얼마전 기자에게 “노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힘들었던 90년대 중반쯤 기초단체장에서 출발해서 광역단체장, 국회의원, 그 다음을 노리는 것도 좋을 듯하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고 전한 바 있다. 현재 김 장관의 거취 문제를 둘러싸고 총선출마설, 경남지사출마설 등이 나돌고 있는 것도 노 대통령의 이러한 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참여정부 출범후 김 장관의 애칭이 ‘리틀 노무현’으로 통하고 있는 것도 노 대통령과 김 장관의 이러한 닮은꼴 인생에서 기인한다.

이처럼 자신이 걸어온 인생역정이 노 대통령과 비유되면서 일약 스타장관으로 자리매김한 김 장관이 취임 7개월여만에 최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한나라당이 제출한 자신의 해임건의안이 3일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풍전등화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비록 노 대통령이 자신을 엄호하며 시한부 해임안 수용 불가 원칙을 시사하긴 했지만 김 장관이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란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초강력 대응 방침을 천명한 한나라당의 압박을 노 대통령이 안고 가기에는 너무 버거울 것이란 시각.따라서 정치권은 노 대통령이 시한부 수용 불가를 시사한 만큼 국감이후 김 장관 스스로 자진사퇴하는 방향으로 김 장관 거취문제가 매듭지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또 일각에서는 김 장관이 노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보다 빠른 시일을 선택해 사퇴를 결행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와관련, 김 장관은 얼마전 한 시사프로그램에 출연, 추석 연휴 직후 사실상 자진사퇴하고 내년 총선 때 고향인 경남 남해에서 출마할 뜻이 있음을 내비쳤다.이날 SBS ‘염재호 교수의 시사진단’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 장관은 “추석 때 선배와 동지를 만나 무엇이 국정운영과 지방분권에 도움이 될지 이야기한 다음 추석 이후 입장을 정리하겠으나,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해 자진사퇴 의중을 시사했다. 그는 또 내년 총선 출마 여부와 관련해서는 “추석때 고향에서 논의한 뒤 결정하겠지만 총선에 나가려는 것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다”며 “현장 중심의 정치를 하게 된다면 전국 정당으로서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정책중심의 정당으로 가는 개혁신당쪽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지난해 3월 경남도지사 출마를 위해 남해군수직을 물러나면서 자신의 야심을 펼칠수 있는 기회를 기대하며 ‘남해군수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책을 낸 바 있는 김 장관.그가 거대 야당의 압박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남해 번지점프대에서 새로운 정치인생을 다시 펼쳐 나갈수 있을지 그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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