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 상자 열렸다’ 고문·협박으로 ‘허위 자백’

이춘재 [뉴시스]
이춘재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1차 사건이 벌어진 지 33년 만에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달 DNA 감식을 통해 용의자를 특정한 경찰은 여러 차례 부산 교도소를 방문, 취조한 끝에 이춘재(56)씨로부터 범행에 대한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씨가 자백한 범행은 화성 연쇄 살인사건 외에도 총 살인 15건, 성범죄 30건 등 40건을 넘는다. 경찰 측에서는 국내 최악의 미제 살인 사건 해결에 들떴다. 시민들 역시 발표 초기에는 미제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추적해 해결한 경찰의 끈기를 칭찬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건의 흐름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 씨가 모방 범죄로 결론 나 용의자가 처벌까지 받은 화성 8차 사건 역시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범인으로 재판에 회부됐던 윤 모씨는 꾸준히 억울함을 주장해 왔다. 윤 씨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재심 청구 준비에 착수할 계획이다. 만약 이 씨와 윤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경찰은 부실·강압 수사 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며칠 간 잠 안 재우며 고문·폭행해”
“명예 회복하고 싶어…재심 청구할 것”

논란은 지난 4일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이 씨가 모방 범죄로 결론 난 8차 사건을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불거졌다. 8차 사건은 박 모(13)양이 지난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한 주택에서 잠을 자던 중 살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7차 사건 발생 이후 9일 만에 발생했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모방 범죄로 결론 내리고 범인으로 박 양 오빠의 지인이었던 윤 씨(당시 22세)를 검거했다. 이후 윤 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법원까지 상고했으나 형을 확정 받았다. 약 19년 6개월 간 복역한 윤 씨는 지난 2010년 감형 받아 출소했다.
문제는 윤 씨가 당시부터 결백과 함께 경찰의 폭력·강압수사를 주장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윤 씨는 국선 변호사의 법적 조력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계에 따르면 그는 1990년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소했다. 그러나 결심공판 당시 국선변호사는 재판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검사가 재판부에 형량을 요청하는 결심공판을 할 경우 변호인이 출석해 최후변론을 한다. 국선변호사 대신 결심공판에 출석했던 변호사는 “원 변호인이 나타나지 않아 갑자기 부탁을 받고 법정에 섰던 것”이라며 “윤 씨와 대화하거나 변론에 직접 관여하지 않아 특이한 사건임에도 기억에 남는 게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실제 윤 씨의 항소심 판결문에 따르면 국선변호인은 무죄를 주장하는 윤 씨의 입장과는 다른 취지의 항소이유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씨는 사건 발생 시각 자신의 방에서 지인과 잠을 자고 있었지만 경찰에게 고문을 당해 허위로 자백했다는 내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선변호인은 ‘윤 씨가 범행은 인정하되 초범이고 소아마비로 인한 열등감에 우발적으로 범행한 것’이라며 양형부당을 주장했다. ‘무죄’를 주장하는 윤 씨의 입장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항소이유서가 국선변호인의 독단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윤씨는 최근 경찰 조사에서까지 “내가 (범행을) 하지 않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내세운 근거는?
중금속·혈액형

당시 경찰이 윤 씨를 범인으로 특정한 이유는 ‘혈액형’과 ‘중금속’ 때문이었다. 피해자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를 국립과학수사연구권에 보내 확인한 결과 혈액형은 B형이고, 중금속으로 분류되는 티타늄(13.7ppm)이 다량 검출됐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농기계 수리공으로 일하던 윤 씨를 체포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혈액형이 틀리는 경우가 많았다. 또 중금속이 검출됐다는 이유로 농기계 수리공을 범인으로 특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1차원 적인 수사였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 관계자는 “혈액형은 수사 기록상에 많이 나와 있으나 시료 등이 오염됐거나 감정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범인 혈액형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기에 명확히 수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윤 씨는 자백이 경찰의 고문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지난 9일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경찰 조사가 고문과 협박의 연속이었다고 폭로했다. 경찰들이 자신을 야산 정상으로 끌고 간 것은 물론, 소아마비 때문에 한 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데도 쪼그려 뛰기를 시켰다는 것이다. 윤 씨는 “쪼그려 뛰기 시키는 데 못 하니까 (형사가) 발로 걷어찬 기억이 난다”면서 “돌아가면서 손바닥으로 때리고 주먹으로 때리고, 뺨 두 대도 때렸다”고 호소했다. 이어 “내가 잠을 자려고 하면 깨우고 깨웠다”라면서 “목이 타서 물 한 병 달라니까 ‘자백하면 다 해주겠다’고 했다”고도 털어놨다. 윤 씨는 “(경찰이) ‘여기서 죽어 나가도 상관 없다’고 했다”며 “현장 검증도 경찰이 시키는 대로 했다. 유단자들이라 급소만 때려서 30년이 지난 지금 후유증이 온다”고도 덧붙였다.
윤 씨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출소할 날을 위해 기술을 배웠다고 전했다. 그는 “밖에 나가서 먹고 살아야 해 봉제 기술을 배웠다”라면서 “1급 모범수를 따기 위해 10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복역 중에도 재심을 생각했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던 탓에 포기했다고 전했다. 윤 씨는 “돈 얼마 하자고 내가 그러는 건 아니다”라면서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사람 명예는 한번 떨어지면 그걸로 끝이다”라고 토로했다.

경찰 측 “이춘재 자백 유의미한 부분 있다”

경찰 측은 8차 사건이 자신의 소행이라는 이 씨의 자백 중 유의미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지난 10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브리핑에서 “자백 진술 안에 의미 있는 부분이 있다”면서 “진짜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그런 진술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씨가 허위자백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풀이되는 대목이다. 경찰은 우선 남아 있는 8차 사건 증거물 ‘토끼풀’과 유사한 수법의 미제 절도 사건에서 남은 ‘창호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 분석을 의뢰했다. 이와 함께 윤 씨를 검거해 경찰에 송치한 형사들을 불러 조사하는 등 투트랙 방식으로 8차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계획이다. 다만 토끼풀과 창호지 모두 유력 증거는 아닌데다 당시 형사들이 “그때 국과수의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 등에 따라 윤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는데 국과수의 분석 결과를 믿고 확실하다는 생각에 윤 씨를 불러 조사했기 때문에 고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어 자백의 신빙성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나오기는 희박한 상황이다.

윤 씨 재심, ‘약촌오거리’ 박준영 변호사가 맡아

현재 윤 씨는 재심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를 위해 ‘약촌오거리 사건’의 재심을 맡아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던 박준영(44) 변호사가 나섰다. 박 변호사는 지난 9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그는 글에서 “‘언론이 30년 전에 나를 도와줬느냐. 내가 잡혔을 때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언론은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몰아갔다’ 8차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 간 옥살이를 한 윤모 씨가 기자들을 적대시하는 이유”라고 운을 뗐다. 이어 “사건에 대한 개인적 욕심을 내려놓고 이 사건에 딱 맞는 변호사님을 모시고 변호인단을 꾸릴 생각”이라면서 “변호인단 구성이 마무리되면 공개하겠다. 윤 씨 입장에서는 하늘이 준 기회다. 잘 살려가겠다”고 다짐했다.
박 변호는 또 “이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들이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며 “다행이지만 같은 조직 구성원의 책임이 문제되는 사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경찰이 조사를 잘 진행하는지 경계하며 지켜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당시 경찰은 소아마비 때문에 한 쪽 다리를 잘 못 쓰는 윤 씨에게 쪼그려 뛰기를 시켰다고 한다”면서 “지금의 경찰이 이 사건 바로잡길 바란다.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변호가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까지 발을 들인 만큼, 윤 씨의 주장과 이 씨의 자백이 사실일 경우 경찰은 강압·폭력 수사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해당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들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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