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목포상고 4년 후배 … 인제 보궐선거 운동원으로 정치 인연DJ 야당 총재때 자금·조직관리 도맡아 … 13대때 국회 첫 등원한보사태 진승현 사건 이어 현대비자금으로 3번째 구속‘영원한 DJ 그림자’, ‘동교동계 좌장’, ‘DJ정부 막후 실력자’. 민주당 권노갑 전고문을 지칭할 때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김대중(DJ) 전대통령에 대한 권 전고문의 충성심은 신앙에 가깝다. 권 전고문은 40여년 DJ와 함께한 정치역정속에 단 한번도 DJ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고, 97년 정권창출 이후에도 이러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DJ와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DJ정부 당시에는 ‘권부’라는 새로운 별칭이 생겼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그를 가리켜 부통령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처럼 DJ와의 특별한 관계와 막후 실세론은 대형 권력형 비리의혹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의 이름을 ‘리스트’에 올려놓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지난 97년 2월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또 지난해 5월에는 진승현씨로부터 5,000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된 바 있는 그는 최근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현대비자금 사건으로 또다시 구속되는 불운을 맞이하고 있다.“죽어서도 충성, 이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김대중이라는 인물과 동일한 생각과 사고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 왔다.” 권 전고문이 정권교체 이후 출간한 책「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서두에 나오는 말이다. DJ에 대한 권 전고문의 충성심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사례다.그렇다면 왜 권 전고문은 DJ를 신앙처럼 받드는 것일까. 그 해답은 DJ와 함께한 권 전고문의 인생역정과 40년 정치역정을 들여다보면 어느정도 실마리가 풀린다.30년생인 권 전고문은 DJ의 목포북교, 목포상고 4년 후배다. 그가 DJ를 처음 만난 것은 목포상고 입학때.

당시 DJ는 초등학교 수석 졸업에 목포상고도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인데다 잘 생긴 외모로 후배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권 전고문이 DJ와 본격적인 정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때다. 당시 목포여고 영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학교선배인 DJ가 3대 총선 때부터 세 차례나 계속 낙선하는 것을 지켜본 뒤 안타까운 마음에 DJ가 출마한 인제 보궐선거에 뛰어들면서 정치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재경목포상고동창회’를 결성, 실무간사를 맡고 있었던 권 전고문은 동창회 대표자격으로 무작정 DJ를 찾아가 DJ의 선거운동원으로 활약했던 것. 인제 보권선거는 DJ가 처음으로 금배지를 단 선거였다.이후 동교동계 가신그룹을 형성하며 맏형 역할을 담당해 왔던 권 전고문은 13대 국회때 비로소 금배지를 달게 된다. 12대 총선 때도 출마할 의사가 있었으나 DJ의 만류로 뜻을 굽힌바 있다.

3선 고지를 바라보던 15대 총선 때도 자신의 지역구인 목포 선거구를 DJ의 장남인 김홍일 의원에게 미련없이 넘겨줬다. DJ에 대한 충성심을 여과없이 보여줬던 사례들이다.이처럼 DJ에 대한 그의 신앙같은 충성심은 DJ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DJ가 야당 총재 시절 권 전고문에게 전적으로 자금과 조직 관리를 맡겼던 것은 두 사람간의 각별한 신뢰와 믿음에서 비롯됐을 것이란 분석이다.이처럼 충성심 하나로 DJ와 정치역정을 함께 해온 그에게 돌아온 건 고문과 투옥, 수배를 피한 도피행각 뿐이었다. 70년대엔 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밥먹듯이 받았다. 71년에는 일명 ‘통닭구이’ 고문을 받으며 DJ의 금전관계 여자관계를 추궁받았고, 76년에는 긴급조치 비방혐의로 기소, 3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특히 71년 대선 이후 곧바로 치러진 8대 총선때는 DJ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대선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DJ를 최대의 정적으로 지목하면서 은밀히 ‘김대중죽이기’공작을 가동시켰을 때였다.

5월24일 목포에서 지원유세를 마친 DJ와 권 전고문 일행은 상경차 광주공항으로 자가용을 몰고 가던중 대형사고를 당했다. 14t 대형 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DJ 일행이 탄 자가용을 덮쳐 오자 간신히 트럭을 피하기는 했지만 뒤따라 오던 신혼부부를 태운 택시가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해 택시에 타고 있던 신혼부부가 현장에서 즉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 당시 DJ는 왼쪽 손목과 오른쪽 다리에 중상을 입어 지금까지 다리를 절고 있고, 권 전고문도 온몸에 유리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권 전고문은 또 97년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또 한번 시련을 겪게 된다. 93년 한보그 룹 정태수 명예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이 ‘포괄적 뇌물죄’에 걸려 3년형을 선고받고 전국구 의원직마저 내줘야 하는 고초를 감내해야 했던 것. 그의 구속은 DJ의 대권레이스에도 상당한 악영향으로 작용했다. 도덕적인 타격은 물론 가신정치에 대한 비난 여론이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소위 동교동계 가신그룹으로 분류됐던 김옥두 한화갑 최재승 윤철상 의원 등은 숨어서 대선운동을 지원하는 신세로 전락했고, 선거가 임박하자 DJ가 당선되더라도 임명직 공직에 절대 나서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하기에 이르게 된다. 당시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권 전고문도 이들 가신그룹의 의사를 전달받고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그는 서울구치소 수감 기간을 독재정권 당시의 옥고때 보다 더욱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DJ의 대통령 당선 소식을 구치소 안에서 들어야 했고, 역사적인 정권교체 과정에도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정권교체로 “이제야 고생이 끝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권 전고문에게는 또다른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98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출감하자마자 그는 또다시 외국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됐기 때문이다. 대선전부터 불어닥쳤던 가신정치 청산 여론이 그의 출감과 함께 또다시 불거졌다. 그는 이때에도 DJ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미련없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그러나 그가 출국한 후 귀국시기를 놓고, 또 귀국후에는 정치재개 여부를 놓고 정치권 주변에서는 갖가지 해석이 난무했다. 이는 권 전고문의 식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과 무관치 않다.98년 12월 귀국한 권 전고문은 여론과 DJ의 의중을 살피며 눈에 띄는 정치행보를 자제했다. 잠행생활을 1년 가까이 하다보니 정치권 일각에서는 DJ가 그를 버리지 않았나 하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DJ는 그를 선택했다.

신당 창당과 총선을 앞둔 99년11월 청와대 비서실 개편때 당시 신주류가 지원했던 김종인 전경제수석을 제치고 권 전고문의 입김이 작용한 한광옥 의원이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던 것.이후 권 전고문은 총선 출마의 뜻을 다시 한번 접고 공천과정에서 막후 역할을 담당하면서 ‘실세’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천 구설수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공천 경쟁을 벌이고 있던 인사들이 권 전고문에게 줄을 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막강 영향력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였다. 정치권 주변에선 그가 총선때 상당수 후보들에게 적지 않은 실탄을 지급했다는 소문도 끊이질 않았다.최근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현대비자금 사건도 이러한 소문과 맞물려 있다. 권 전고문은 2000년 4·13총선 직전에 현대측으로부터 청탁과 함께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

97년 한보사태, 지난해 5월 진승현게이트와 관련해 구속된 이후 세 번째 구속이다.특히 권 전고문은 지난달 진승현게이트와 관련한 항소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DJ를 찾아가 큰절을 하며 “하늘에 정의와 양심이 있어 이같은 결과가 나왔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하지만 이러한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는 또다시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또 현대비자금과 관련한 그의 구속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가 구속된 배경에는 정경유착과 불법선거자금 등 구태한 한국정치사의 잔재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권 전고문의 구속과 검찰의 향후 수사 추이에 정치권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도 정치자금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정치현실과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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