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해가 바뀐 1360년(공민왕9) 2월 하순. 
고려군은 2만 명의 병력으로 홍건적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 서경 탈환을 시도했다.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서북면병마사에 올라 있던 최영은 이방실·안우 등과 함께 생양·철화·서경·함종(평남 강서) 등지에서 홍건적과 싸워 이들을 물리쳤다. 특히 최영은 홍건적의 선봉대장 한림아(韓林兒)와 마상검투를 벌여 단숨에 적장의 목을 베어 아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홍건적은 4만여 명 중 겨우 300여 명이 살아남아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도망쳤다. 고려는 70일 만에 홍건적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1차 침공에서 홍건적은 서북면을 장악하고, 서경까지만 진격했기 때문에 이남 지역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인명 피해는 막심해서 민간인 1만여 명을 포함하여 2만여 명이 사망했다. 
최영은 홍건적을 물리친 전공으로 평양윤(平壤尹) 겸 서북면순무사(西北面巡撫使)를 제수 받아 구휼소를 설치하고 백성들에게 종자를 나누어 주며 파종을 권하는 한편, 싸움에서 전사한 군사들의 뼈를 거두어 묻어 주었다.

1361년(공민왕10) 2월 갑진일. 정계를 은퇴한 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이제현은 공민왕의 부름을 받았다. 공민왕은 이제현에게 말했다.
“최근 병란이 계속 일어나며 각종 재앙과 천재지변이 빈번이 발생하고 몇 년째 이어진 흉작으로 백성들은 살길이 막연합니다. 장인어른께서는 과인에게 백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전하, 《논어》에는 ‘위정자의 행동이 옳으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이 따를 것이나, 위정자의 행동이 옳지 않으면 명령을 내려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사옵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난세에는 전하부터 솔선수범해야 민심이 바로 설 수 있는 법이옵니다.”
“잘 알겠습니다. 천의(天意)에 순응하는 길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에 이제현은 주나라 주공(周公)이 성왕에게 군주의 도리를 가르친 《무일편(無逸篇)》을 이야기했다.
“작년 초에 가뭄이 심하자 전하께서는 하루에 한 끼씩만 먹고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했으며, 나아가 사방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모든 관원들에게 3년상을 폐지한 바 있사옵니다. 이는 전하께서 주공의 무일(無逸, 안일을 탐하지 않음)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것이옵니다. 군주는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가를 알게 되는 법이옵니다.”  
“요동과 심양지방의 유랑민이 귀환하는 자들이 많이 늘었는데, 이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겠습니까?”
“유랑민들이 서북지방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토지를 개간하게 하고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주어 자립기반을 닦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옵니다. 그러한 포용정책이 결국에는 부국강병으로 가는 첩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옵니다.”
“홍건적은 향후 어떻게 움직일 것 같습니까?”
“홍건적은 안정적인 세력 기반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요양과 심양 일대의 고려 유민들을 흡수하고 식량과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여 재기를 노리고 있사옵니다. 정세운 장군이 일전에 ‘홍건적이 서경에 목책을 세우고 성을 수리한 것으로 보아 다시 침입해올 것이 분명합니다’ 라고 상주한 일이 있사옵니다. 소신도 정장군의 생각과 같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유민들을 서북면에 정착시켜 서북 지방의 방어력을 보강하고 경계태세를 강화하는 등 홍건적에 대한 항구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홍건적의 2차 침입

1361년(공민왕10) 9월 14일.
이제현이 공민왕에게 상주한 홍건적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이 미처 실시되기도 전에 홍건적은 재차 침입했다. 이번엔 1차 침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본격적인 침입이었다. 1차 침공이 있은 지 일 년 반만의 일이었다.  
홍건적의 반성(潘誠),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는 20만 병력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고려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삭주(朔州, 신의주에서 북동 80㎞ 지점에 있음)와 이성(泥城)을 함락한 후, 11월 초에 무주(撫州: 영변, 평양에서 북쪽으로 80㎞ 지점에 있음)에 집결했다.
홍건적의 남침이 있자 조정은 참지정사 안우(安祐)를 총사령관격인 상원수로, 정당문학 김득배(金得培)를 도병마사로, 동지추밀원사 정휘(鄭暉)를 동북면도지휘사로 임명하고 청천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다. 
이와 별도로 동지추밀원사 이여경(李餘慶)으로 하여금 서경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목인 자비령(慈悲嶺, 황해도 황주군 소재)에 방책을 쌓고 방어태세를 갖추게 했다. 청천강 방어선이 무너지더라도 홍건적의 남진을 저지하여 시간을 확보할 목적이었다. 
자비령은 역신 최탄(崔坦)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 54성과 자비령 이북의 6성을 합하여 모두 60여성을 가지고 몽골에 귀순하여 이곳을 동녕부(東寧府)라 칭함으로써 1270년(원종11)부터 1290년(충렬왕16)까지 여·원의 국경이 되었던 곳이다.
이어 군마를 징발하고, 병력 보충을 위해 모병 활동을 전개했다. 응모자에게는 혜택을 부여하여 선비나 향리에게는 벼슬을 주고, 노비에게는 논과 비단을 주거나 양민으로 상승시켜주기도 했다. 
이후 고려군은 안주(安州) 일대 방어선을 강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평안도(平安道) ‘평안’은 평양과 안주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안주성은 995년(성종14)에 명장 서희가 축성한 것으로, 북쪽으로 청천강의 물줄기를 두르고 동쪽으로는 험준한 산세가 잇닿은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천험의 요새였다.  
그러나 홍건적은 번들거리는 말을 타고 파죽지세로 몰아왔다. 불시에 청천강을 도하(渡河)하여 안주의 고려군을 격파했다. ‘안주가 무너져 자비령으로 퇴각했다’는 장계(狀啓)는 홍건적이 안주를 떠난 지 하루 반나절 만에 개경의 만월대에 도착했다. 북서풍을 등에 업은 홍건적은 우렛소리 같은 말발굽을 일으키며 저승사자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11월 11일. 
자비령 방어선마저 무너졌다. 북방에서 오는 장계를 받은 공민왕은 보료에 몸을 기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등을 곧추세우고 먼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조정은 엄동설한의 대지처럼 얼어붙었다. 아무도 뾰족한 계책을 내지 못했다. 무기력한 몽진론과 허무한 옥쇄론이 허공을 갈랐다.
어전에 입시한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전하, 적세(敵勢)가 다급하므로 몽진(蒙塵) 말고는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결단을 내리소서.”
“전하, 일단 남쪽에 조정의 피난처를 마련해 놓고 후일을 도모하소서.” 
이에 문하시중 홍언박(洪彦博)이 외롭게 몽진을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아직 서경이 건재합니다. 옥쇄(玉碎)를 해서라도 개경을 끝까지 사수해야 하옵니다. 개경을 버리면 고려 사직을 버리는 것이니 통촉하시옵소서.”
그러나 홍언박의 옥쇄론에 고개를 들지 못한 대소신료들은 한 목소리로 파천(播遷)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먼저 평장사 김용(金鏞)이 나섰다.
“전하, 지체할 시각이 없사옵니다. 서두르지 않아 길이 막혀 행렬이 더디어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옵니다. 어가(御駕)가 움직이지 않으면 종묘와 사직에 죄를 짓게 되옵니다.”
이어 판도판서 김원명(金元命)은 침통해하고 있는 왕을 위로하는 말을 하였다.
“적들이 한 겨울에 대군을 휘몰아 깊이 들어왔으니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전법(戰法)에는, 이보전진(二步前進)을 위해 때로는 과감하게 일보후퇴(一步後退)하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천리 길을 가려면 때로는 태산준령도 넘어야 하고, 때로는 거센 바다도 건너야 하는 법이옵니다. 전하께서 연부역강(年富力强)하시니 한때의 곤궁한 사직을 반드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말을 들은 공민왕이 천장을 응시하며 들리지 않을 정도로 힘없이 하문하자 신료들의 이마는 편전 땅바닥에 닿았다.
“음, 대동강은 얼었는가?”
문하시중 홍언박이 대답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아직 얼음이 두껍지 않아서 군마와 적병이 걸어서 건너지는 못할 것입니다.
“금성탕지의 천험의 요새라던 안주와 자비령의 방어진지마저 무너졌으니…….”
중얼거리듯 말하고 있는 공민왕에게 판추밀원사 이춘부(李春富)가 다시 몽진을 역설했다. 
“중원을 장악했던 천자의 나라에도 한때의 약세는 있었고, 황제가 도성을 버린 예도 없지 않았사옵니다.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서라도 몽진을 서둘러야 하옵니다.”
“파천이 여염집의 이사가 아닐진대, 어떻게 쉽게 몽진을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서북면도순찰사 최영(崔瑩)이 기다렸다는 듯이 울면서 만류했다.
“전하, 안주에서 서경까지는 이틀거리입니다. 바라옵건대 조금만 더 도성에 머무르면서 기다려 주시옵소서. 의병을 모아 종묘사직을 지키겠사옵니다.”
최영의 피 끓는 절규로 몽진은 잠시 미뤄졌다. 모병관들의 애끓는 목소리가 개성 도성을 뒤덮었다.

“지금 홍건적들이 개경을 향해 침공해 올지라도 전하께서는 몸소 융의(戎衣, 군복)를 입고 개경을 수호하기로 어명을 내리셨다!”
“충신열사는 다 모여라!”
“개경 장정들은 의병으로 뭉쳐 나라를 구하자!”

그러나 모병관들의 호소가 전란에 피폐해진 백성들의 귀에 들릴 리 만무했으며, 모병관들의 허탈한 목소리는 송악산에 메아리쳐 되돌아왔다. 이때는 이미 ‘20만명의 홍건적이 자비령 방어선을 무너뜨렸다’는 소문이 장계보다 먼저 개경에 당도한 터이라 민심이 조정에 이반되어 모병(募兵)에 응하는 자가 없었다.
백성들은 앞 다투어 썰물처럼 개경을 빠져 나가며 저마다 푸념을 털어놓았다. 

“노자(路資)가 있어야 피난을 가더라도 잠자리를 얻고 죽이나마 먹고 무른 똥을 쌀 수 있지.”
“값나가는 물건을 남겨두고 가면 홍건적이 들어와 뒤지면 다 털릴 텐데.”

이렇게 남부여대(男負女戴)하며 일시에 개경을 탈출하는 피난행렬은 거대한 장사진을 이뤘다. 늙은이와 어린이는 넘어지고 엎어져 밟혀 죽었으며, 자식과 어미가 서로 찾아 헤매며 울부짖는 소리가 성 안팎에 가득하였고, 시체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어 거리는 온통 아비규환(阿鼻叫喚)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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