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 달러’짜리 이민 티켓도 ‘불티’

인천국제공항 [뉴시스]
인천국제공항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마자 발발한 6·25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희망이라는 게 보이지 않던 상황. 그럼에도 국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하나만을 목표로 아무것도 없던 땅에 씨앗을 뿌리고 공장을 세웠다. 당시 국민들이 흘린 피와 땀은 휴전 약 70여 년이 지난 지금 발전한 대한민국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찬란한 발전을 이뤄낸 대한민국 국민들이 최근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고 있다. 미국이나 싱가포르 등을 찾는 이민 희망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자부심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한민국 국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미래 낙관적이지 않아서 이민 준비”
“투자 이민 리스크 커…철저히 준비해야”

서울 강동구에서 치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A(56·여)씨는 얼마 전부터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30여 년 전 미국에 건너가 터를 잡은 동생이 꾸준히 이민을 권유해왔고, A씨 역시 최근 대한민국의 상황에 우려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A씨가 이민을 생각하는 이유는 단연 ‘미래’다. 인근에 병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며 ‘제 살 깎아먹기 식’ 경쟁을 하고 있다고 A씨는 토로한다. 인건비와 임대료는 날이 갈수록 오르는데,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니 버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A씨는 “점점 살아남기 힘들어질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차라리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이민을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며 “몇 년 안에 한국을 떠나는 것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은 비단 A씨 뿐만이 아니다. 미국 국무부 비자 발급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8년 투자이민 비자를 발급받은 대한민국 국민은 531명이다. 2017년보다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대한민국의 투자이민 발급은 중국과 베트남, 인도에 이은 4위다. 실제로 최근 서울 등에서 열리는 투자이민 설명회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어 자리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지방에서도 차츰 이민 설명회가 개최되는 추세다. 이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을 가진 30~40대 국민들이다. 서울 강남권 학원가나 아파트 게시판에는 이민·비자 컨설팅 에이전시들이 뿌려놓은 홍보 전단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민 ‘붐’ 일어난 이유는?

이민 ‘붐’이 일어난 데는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이미 침체돼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5일(현지 시각) 대한민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2.6%에서 2.0%로 하향 조정했다. 기획재정부 역시 18일 발간한 ‘10월 그린북(최근 경제동향)’에서 “최근 우리 경제는 생산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수출 및 투자의 부진한 흐름은 지속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7개월 연속 ‘부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린북 작성을 시작한 2005년 이후 처음이다.
이처럼 경제가 점점 침체되는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낀 대한민국 자산가들이 이민을 택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커지는 세금 부담을 피해 자유로운 경제, 상속 활동을 보장하는 미국이나 싱가포르, 캐나다, 호주 등을 택하는 것이다. 캐나다와 호주는 이미 지난 1970년대 상속세를 폐지한 바 있다. 미국은 지난해 증여세 면제 한도를 기존 549만 달러(약 65억 원)에서 1120만 달러(약 133억 원)로 2배가량 대폭 높였다. 사업가들이 선호하는 싱가포르 역시 세금 부담이 대한민국에 비해 훨씬 낮다. 상속이나 증여세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법인세도 대한민국(25%)보다 낮은 17% 수준에 불과하다. 여기에 더해 비행기로 6시간 정도면 갈 수 있어 대한민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편이라는 점도 매력으로 다가온다.
이 외에도 정부의 정치적 성향이 자신과 맞지 않거나, 중국발 미세먼지를 견디지 못한 에어 노마드(Air Nomad)족 역시 이민을 선택하고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에 미세먼지가 가득한 봄철만 외국에 거주하는 형식으로 ‘한시적 이민’을 선택하기도 한다. 또 부모의 도움을 받아 어린 나이에 투자이민을 떠나는 20대 젊은이들도 증가하는 추세다.

투자 이민 얼마?
미국 11월 21일부터 90만 달러로 상향

미국이나 싱가포르 등으로 이민을 떠나기 위해서는 재산이 얼마나 있어야 할까. 먼저 미국은 현재 50만 달러(약 6억원)를 투자해 일자리를 만들면 영주권을 주는 투자이민(EB-5)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학력이나 영어점수, 투자액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호주나 캐나다와 다르게 상대적으로 쉽게 영주권을 받을 수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미국은 오는 11월 21일부터 투자이민 금액을 대폭 상향할 예정이다. 미국 이민국(USCIS)에 따르면 이날부터 투자이민 가능 금액은 90만 달러(약 10억6200만원)로 2배 가까이 늘어난다. 목표고용지역(TEA)이 아닌 지역으로 이민을 원할 경우에는 180만 달러(약 21억2400만원)를 투자해야 한다. 또 개정된 법안에 의해 최소투자금액은 향후 5년 마다 미국 이민국이 조정할 수 있게 됐다. 갈수록 필요한 금액이 높아질 수 있는 상황으로 변한 것이다. 해당 소식이 전해진 뒤 투자 이민을 희망하는 대한민국 국민들 사이에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싱가포르 역시 적지 않은 금액을 내야 투자 이민을 허락받을 수 있다. 현재 싱가포르에서 외국인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는 기업이나 펀드에 250만 싱가포르 달러(약 22억원)를 투자해야 한다. 사업 능력도 증명해야 한다. 연간 5000만 싱가포르 달러(약 433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사업체 운영 경험과 증빙 서류가 필요하다.
미국이나 싱가포르에서 요구하는 엄청난 액수의 투자금이 부담되는 사람들은 동남아 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만 50세 미만 이민 희망자에게 50만 링깃(약 1억4000만원) 이상의 자산과 부부를 합쳐 1만 링깃(약 280만원) 이상의 월 소득만 증빙하면 10년마다 연장이 가능한 비자를 발급해준다.

50만 달러 내도 확실하지 않아

이민은 아예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니만큼 고려해야할 문제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적응 여부다. 서양의 경우 여전히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인식이 남아있는 곳이 많다. 특히 호주의 경우에는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 2016년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체험했던 직장인 B(27·여)씨는 “카페에서 일했는데 인종차별을 겪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라면서 “동양 여자를 쉽게 보고 캣콜링(길거리를 지나가는 불특정 여성을 향해 휘파람 소리를 내거나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는 행위)을 하거나, 대놓고 원숭이 흉내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실 호주 이민을 생각하고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던 건데, (인종차별에 시달려) 다른 나라를 찾아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문제다. 평생 먹고살 만한 재산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민한 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이민 인기국으로 떠오르는 나라들도 일자리가 넉넉한 형편은 아니다. 캐나다에서 남편과 함께 거주 중인 C씨(32·여)는 “이주 초반 일자리를 구하기가 정말 힘들었다”라면서 “부모님께서 거의 6개월을 도와주셨다. 외국인은 더욱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고 전했다.
미국 투자이민의 경우에는 과정이 더욱 까다롭다. 먼저 대한민국 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기록이 없어야 한다. 또 50만 달러의 투자금을 내더라도 100만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는 자산증명이 필수적이다. 이 때도 미국 이민국은 영구 영주권이 아닌 임시 영주권을 먼저 발급한다. 투자이민을 한 사업체가 2년 이상 정상적으로 운영돼야 영구 영주권 전환 기회를 준다. 2년 이상 운영되지 못할 경우 이민에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50만 달러의 최소 투자금액으로 이주할 수 있는 지역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경우가 많아 이 역시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한 이민 컨설팅 업체 관계자는 “이민 문의가 많이 들어오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쉽게 생각하고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급하게 준비해서 떠났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믿을 만한 컨설팅 업체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이 얼마나 찾아보고 노력하는지에 이민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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