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11월 18일. 
서경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장계(狀啓)가 궁궐에 도착하던 날 아침이었다. 궁궐에는 전에 못 보던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치지 않고 울었다. 처량한 소리로 사람을 향해 슬피 우는데 마치 남쪽으로 빨리 떠나라고 시늉하는 것만 같았다. 공민왕도 이 새를 눈여겨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끝에 드디어 몽진할 마음을 먹었다. 
개경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승선(承宣,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는 정3품) 이색이 두루마리 장계를 받들어 올렸다.
“서경유수(西京留守)의 보고이옵니다.” 
“문하시중이 장계를 읽어 보시오.”
“전하, 홍건적이 벌써 서경을 지났다 하옵니다.”
어전에 입시한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다시 한 번 한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속히 성지(聖旨)를 내려주소서.”
“과인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도성을 버릴 수 없소. 이제 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하지만 적들이 이미 서경을 지났으므로 공민왕의 말은 공허한 독백처럼 들릴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공민왕과 조정은 경상도 복주(福州, 안동)로 몽진을 하기로 결정했다. 
개경을 버리기 전날 밤에 공민왕은 대소신료들에게 울면서 말했다.
“종묘와 사직이 여기에 있는데 과인이 역사에 큰 죄를 짓는구나!”
대소신료들은 모두 다 손바닥으로 편전바닥을 치며 오열했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신들을 죽여주십시오. 민심이 당장은 조정을 떠나 있으나 오로지 전하를 향하여 있으니 후일을 도모하소서.”

몽진길에 오른 공민왕과 이제현의 호종

‘홍건적이 다가오고 왕이 몽진을 간다’는 소문은 왕이 몽진 길에 오르기 전에 수철동 이제현의 집에 들려왔다. 고희를 훨씬 넘긴 이제현은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이제현은 선영이 있는 남쪽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의 선영을 향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온몸이 전율하는 오열이 땅바닥을 진동했다.
‘……나는 가야한다. 임금 곁으로. 환란을 미리 지키지 못한 대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호종길이 나의 죽음을 원해도 나는 그것을 기꺼이 맞을 것이다. 천도(天道)가 있다면 고려 사직을 버리지는 않으리라…….’

몽진을 준비하는 횃불은 칠흑 같은 대궐의 어둠을 밝혔다. 지밀나인들은 임금의 이부자리와 가재용품을 짐바리에 얹으면서 하늘을 원망하며 소리죽여 울었다. 밤새 서러운 눈이 펄펄 내렸다. 
11월 19일. 
공민왕을 비롯한 명덕태후, 노국공주, 혜비이씨 등 왕실과 조정은 몽진 길에 올랐다. 어가를 에워싼 의장(儀仗) 뒤로 백관들이 풀죽은 모습으로 뒤따랐다. 노국공주는 가마를 버리고 말을 탔으며, 혜비 이씨가 탄 말이 너무 약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짐 보따리를 둘러멘 백성들은 마소를 끌고 황망하게 어가를 따랐다.

이제현은 노구를 이끌고 소임이 없는 신민으로서 공민왕을 호종(扈從)했다. 그의 뒤를 박씨 부인과 서씨 부인, 그리고 가솔들이 황망히 따랐다. 개경을 버릴 때 공민왕은 구슬피 울었다. 이제현은 눈물로 얼룩진 사위의 처연한 얼굴을 보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전하, 심기를 굳건히 하셔야 하옵니다. 그 옛날 은 탕왕은 하대(夏臺)에서, 주 문왕은 유리(里)에서 유폐당한 적이 있사옵니다. 진(晉) 문공은 적(狄)나라로, 제(齊) 환공은 거()나라로 도망간 적이 있었사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추호도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싸워서 마침내 왕조를 세우거나 천하의 패자가 되었사옵니다. 전하께서 겪고 계신 지금의 고난은 장차 고려가 국권을 회복하도록 하늘이 내린 시련이옵니다.”
공민왕은 장인의 위로의 말에 힘없이 화답하며 끝을 맺지 못했다.
“과연 장인어른의 말씀처럼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이때 국왕의 몽진을 따라간 수행자는 28명에 불과했다. 이제현, 시중 홍언박과 이암, 평장사 김용과 경천흥, 참지정사 정세운, 승선 이색, 상장군 김원명 등이었다. 
11월 20일. 
만월대를 나와 풍교(楓橋), 선죽교(善竹橋)를 지나 동쪽으로 향하면 나성의 동쪽 성문인 숭인문(崇仁門)을 만나게 된다. 숭인문을 떠난 몽진행렬이 장단도(長湍渡)를 통하여 임진강을 건널 때 주먹만한 함박눈이 펄펄 내렸다. 행렬은 눈에 덮인 길이 지워져서 더디게 나아갔다. 겨울 해는 짧아 늦게 뜨고 일찍 저물었다. 남경(한양)에서 하루를 묵은 임금은 일찍 침소에 들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공민왕은 임시 행재소 마루에서 신료들의 문안 인사를 받았다. 그는 풀죽은 어깨에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필묵을 차비 하렸다.”
환관 안도적이 들어와 연상(硯床)을 옮겨 놓으며 먹을 갈았다. 공민왕은 붓을 들었다. 그는 하삼도(삼남)로 보낼 교지(敎旨)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종사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우니 하삼도(下三道, 三南 :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가 서로 내응(內應)해서 속히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의 군사를 휘몰고 올라와 오랑캐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라!’ 

파발꾼은 눈비에 젖지 않게 초로 밀봉한 후 기름종이에 싼 교지를 저고리 속에 보관했다. 말머리에 황금색 띠를 두른 백마는 파발꾼을 태우고 하삼도로 내달렸다. 
묵은 눈이 녹을 새도 없이 밤새 또 눈이 내렸다. 남경의 북한산, 인왕산은 눈 속에 묻혀 아름다운 운해(雲海)를 이루었다. 눈가루는 일진광풍(一陣狂風)에 휘날리어 허공을 수놓고 그 사이를 비집고 힘없는 햇빛이 얼굴을 내밀었다. 
상궁, 나인들은 발이 얼어서 동동 굴렀다. 애처로운 어가행렬은 도성을 빠져나와 광나루에서 도강(渡江)을 했다. 한강이 때마침 결빙되어 도강의 수고로움을 덜어줬다. 눈 내린 한강은 이미 설원(雪原)으로 변해있었는데, 그 위를 까마귀 떼들이 온통 시커멓게 덮고 있었다. 이때 호위 군졸 하나가 돌팔매를 치자 까마귀들이 떼지어 허공에 날아올랐다. 호종하던 한신하가 “부정탄다. 건드리지 마라”고 군졸을 타일렀다.  
그러나 행렬이 경안역(慶安驛, 경기도 광주)에 닿았을 때 호종 관원은 반 이상 달아나고 없었다. 하지만 달아난 관원들을 잡아올 힘도 수단도 없었다. 어가를 따르던 백성들은 혀를 차면서 수군거렸다. 
11월 24일. 
이날은 하루종일 눈과 비가 섞인 진눈개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공민왕이 경안역을 지나 이천현에 도착했을 때 왕의 옷이 젖고 얼어서 섶으로 불을 피워 어한(禦寒, 추위에 언 몸을 녹임)을 하였다. 
밤이 깊어가자 진눈개비는 넓은 들판을 넘어 비바람이 되어 불었다. 산허리에서는 큰바위가 쪼개져 뒹굴었다. 한겨울 날씨인데도 임금이 거처하는 임시 천막 위에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이런 와중에도 시종을 하는 신하, 환관, 상궁, 나인들은 피로에 지쳐 바닥 한편에서 벌써 잠든 지 오래였다. 그러나 공민왕과 이제현은 나라에 닥친 위험과 불길한 예감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 홍건적은 마침내 개경에 입성하여 만월대를 불태웠다. 공민왕과 고려 조정이 개경을 떠난 후 불과 닷새 만이었다. 
홍건적은 도성 안의 소나 말을 모조리 잡아먹었다. 그들은 미처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을 죽여 지져먹고, 어린 아이는 삶아먹고, 아이 밴 부녀의 젖가슴을 구워먹었다. 차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갖은 잔악한 짓들이 자행되었다. 이는 식인풍속이 그치지 아니한 당시의 북방 한족 사회의 야만적인 습속에 기인한 것이었다. 
홍건적은 마소를 잡아 그 가죽을 펴서 성곽에 두르고 물을 뿌려 얼렸다. 고려군이 성벽을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고 화살을 날리면 그대로 튕겨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홍건적은 개경 입성 후 두 달간 주둔하면서 더 이상 남진(南進)을 시도하지 않고 고려군의 개경탈환에 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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