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부동산업체의 대부로 불리는 김현재(47) 삼흥 회장이 9일 구속기소됐다.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에 따르면 김씨는 싼 값에 사들인 토지를 비싸게 되파는 수법으로 212억원을 챙기고, 회사 돈 245억원을 빼돌린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다. 특히 DJ정부시절 여권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알려진 김씨가 재력과 인맥을 바탕으로 정·관계 유력 인사들을 상대로 수십억원대의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돼,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불법자금이 흘러들어갔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정치권에는 또 한 차례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닥칠 전망이다.




불법 정치자금 수사

김씨가 조성한 자금 일부가 정치권으로 유입된 정황이 검찰에 포착됨에 따라 여의도 정가가 술렁이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괜한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일부는 세간의 의혹을 의식하듯 아예 김씨와의 친분설을 부정하고 나섰다.검찰은 일단 김씨가 횡령한 245억원 중 167억원의 행방은 확인했으나, 친인척 증여금 32억원과 양도성예금증서(CD) 구입대금 45억원 등 77억원 가량에 대해서는 용처를 추적하고 있다.

특히 30억원은 2003년~2005년 사이 회사 임직원 등을 통해 양도성 예금증서로 바뀌어진 상태로, 그것이 이번 사건을 풀 수 있는 핵심 열쇠로 지목되고 있는 실정. 검찰은 호남출신인 김씨가 DJ정부시절 여권 실세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왔다는 점에 주목, 행방이 묘연한 30억원이 불법정치자금으로 건네졌을 가능성에 수사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기획부동산의 ‘귀재’

이에 정치권에는 또다시 반갑지 않은 리스트가 떠돌고 있는 상태다. 일명 ‘김현재리스트’로 알려진 명단에는 전·현정권 실세들의 이름이 상당수 거론되고 있다.김씨의 로비의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기획부동산의 귀재로 유명세를 타면서부터 김씨는 정치권 인사들과의 친분관계와 관련, 끊임없는 의혹에 시달려왔다.

2000년 민주당 경기도지부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하고, 최근까지 열린우리당 민생경제특별위원을 지낸 김씨는 지난 정부 실세였던 K씨와 H씨 등은 물론 현 정부의 실세 정치인 Y씨, K씨, C씨 등과도 두터운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대 경영대학원,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다니며 알게 된 정·재계 인사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김씨는 특히 호남 출신 정치인이나 지방자치단체 고위 인사 등과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것. 한 정계 관계자는 “호남지역에서 김씨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씨는 재경호남향우회 부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전남지부 부회장, 김상현 민주당 고문의 호를 딴 후농청소년문화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광주의 지역 신문인 호남매일신문 회장을 겸하고 있다.

2004년 자랑스러운 광주·전남인상에 선정된데 이어, 2004년 평화통일기반 조성과 국민화합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한 정계 관계자는 “지역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김씨는 K, H 전의원, K사의 P회장, B사의 I회장 등을 대동했다”고 전했다. 또 김씨는 현 여권 실세인 모 의원과도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다는 것. 그러나 거론된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었다’며 로비의혹을 일축하고 있다.김씨의 정치비자금 의혹에 물꼬를 튼 사람은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이었다.

김 전의원은 지난 2004년 국회법사위에서 “김씨가 대표로 있는 삼흥그룹과 동원참치 등이 노(무현) 캠프에 영수증 없이 (정치자금을) 전달했다는 자료가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당시 김 전의원은 직접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해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구속됐지만, 정치권내에서 김회장의 로비의혹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은채 무성한 소문들이 떠돌았던 것이 사실이다.

김 전의원의 측근은 이번 사건과 관련, “김의원이 폭탄발언을 했을 당시, 95%에 가까운 정황들이 포착되었으나 증거로 채택되는데는 실패했다”며 “불법로비의혹은 검찰조사결과 밝혀질 문제지만, 김씨가 일부 여권인사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당시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터질 사안이 아니었겠나”라고 말했다.‘비호세력설’도 고개를 들고있다. 이는 김씨가 단기간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관한 부분과 직결된다. 즉 일종의 ‘여권배후설’로, 그의 뒤를 봐주는 인사들이 포진해있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계열사만 10여개

기획부동산업계에서 김씨는 그야말로 ‘기린아’로 통할만큼 뛰어난 사업수완을 발휘해왔다. 전남 영암출신인 김씨는 지난 1999년 부동산 매매업체인 삼흥월드(현 삼흥개발)를 시작으로 이듬해 서광인베스트(현 삼흥인베스트) 등의 계열사를 차례로 설립, 기업수준의 회사로 성장시켰다. DJ정부시절 계열사만 10여개에 달했다는 것은 삼흥그룹이 짧은 기간동안 얼마나 급격한 성장을 했는지를 뒷받침해준다.삼흥그룹의 매출액도 폭발적인 성장을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다. 2001년 250억원이던 삼흥의 매출액은 2004년 1,667억원으로 최근 5년간(2001~2005년)의 매출액만도 무려 5,318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의 기린아로 통해

김씨가 이처럼 삼흥을 국내 최대의 기획부동산 업체로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조직적 판매망을 이용한 ‘공격마케팅’에 기인한다. 삼흥은 계열사당 130~200명 가량의 텔레마케터를 고용,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땅팔기’에 나섰다. 개발제한구역 등을 헐값에 마구 사들인 뒤 수십배에 해당하는 고가로 되파는 수법이었다. 실제로 삼흥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는 한 남성은 “삼흥의 영업방식은 한마디로 ‘살인적인 전화공세’와 ‘말빨’”이라고 털어놨다. “처음부터 먹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열번 찍어서 안넘어가면 수십, 수백번 찍는다는 자세로 영업을 합니다. ‘돈되는 땅이 있는데 회사 실무진들이 특별히 빼놓은 땅이다.

해당지역 공무원에게 개발호재를 직접 들었다’는 식이죠.” 그러나 기획부동산에서 취급하는 땅은 개발이 금지되어 있는 땅이 대부분으로, 맹지에 가깝다는 것이다. 업체측에서는 헐값에 땅덩어리를 사들인 뒤 작게 쪼개어 여러 사람에게 팔아서 이익을 챙기지만, 투자자들은 거금을 들여 아무런 쓸모도 없는 땅을 사는 셈이라는 것. 한 부동산 관계자는 “개발이 불가한 땅에 골프장이 들어서고 도로가 뚫린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사기’예요. 번듯한 사무실을 방문하고 쫙 빼입은 직원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안넘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라고 전했다.

검찰 수사망 피해 승승장구

하지만 삼흥이 초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씨의 사업수완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현재의 삼흥이 있기까지는 막대한 자산을 가진 김씨가 정치인들에게 후원금을 전달하고 ‘부지런히’ 로비한 결과가 아니겠느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김씨가 비자금을 세탁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한 연예기획사의 대표가 유명 조폭으로 알려짐에 따라 김씨와 조폭간의 동업관계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또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음에도 삼흥은 한번도 제대로 철퇴를 맞은 적이 없다는 것도 의혹을 사고있다. 검찰이 기획부동산에 매스를 들이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국내 최대 규모와 전통을 자랑하는 삼흥의 회장이 직격탄을 맞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회장은 피해자들로부터 30여차례에 달하는 고소고발을 당하고 7번이나 기소됐지만 대부분 무혐의 처리됐고, 기껏해야 수십~수백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는데 그쳤다.실제로 삼흥측의 말을 듣고 손해를 봤다는 사람들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개발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판단되는 불모지에 수천만원~수억원을 투자한 이들도 상당수였다.

수년전 삼흥의 권유에 따라 용인의 임야를 샀다는 K씨는 “골프장이 개발된다며 금방이라도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처럼 얘기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땅값은 오를 기미가 없었다. 삼흥측에 항의했지만 그때마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식으로 회피했다”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K씨는 인근 부동산업소에 문의했다고 한다. 결과는 충격이었다. 평당 35만원을 주고 구입한 땅값이 실제로는 2만원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양양온천 분양사건에는 피해자만 3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수사확대방침

이처럼 피해자가 속출함에도 불구하고 그간 김씨가 처벌된 적이 없다는 점은 뒤를 봐주는 배후세력이 있다는 의혹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치권 인사들과의 끈끈한 연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것.특히 김씨가 열린우리당 소속 M, P, L, K의원 등 6명에게 3,990만원의 후원금을 전달한 것으로 확인됨으로써 정치인들과의 교합설도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후원금은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것으로 로비의혹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는 검찰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정치권 안팎에서 의혹은 더욱 불거지고 있는 상태다.

이에 검찰은 김씨에 대한 수사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한 검찰관계자는 “아직 단정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CD가 번번이 음성적인 정치자금이나 뇌물 용도로 사용되어온 점을 감안해볼 때, 이번에도 불법정치자금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한 정계 관계자는 “김씨는 일부 정치권 인사들 사이에서 마당발로 통했다. 여권 관계자 및 동향출신 정치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해왔던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대가성이 없었다는 증거가 나오기까지 로비의혹을 일축할 수 없다”고 말했다.일부에서는 김씨가 지자체나 정부 부처, 정치인 등을 상대로 개발 인허가 청탁 명목으로 로비자금을 뿌렸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한 정계 관계자는 “검찰수사로 ‘몸통’이 밝혀질지는 미지수다. 이번에도 ‘유전무죄’로 끝날지 누가 아는가”라며 검찰 수사에 불신을 나타내기도 했다.공중에 떠버린 30억의 최종 수혜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검찰은 김씨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계좌 추적에 나선 상태다. 김현재 리스트가 몰고 올 후폭풍의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검찰의 칼끝이 어디로 향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