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11월 25일. 
이천현을 떠난 어가행렬은 하루만에 음죽현(陰竹縣, 충북 음성)에 도착했다. 이후 이제현은 노구를 이끌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가며 이틀 후 공민왕과 혜비를 청주까지 호종했다. 어가행렬이 청주에 도착한 날. 음죽현 쪽에서 말을 몰아 달려온 파발꾼이 공민왕 앞에 꿇어앉아 장계를 올렸다.
문하시중 홍언박이 장계를 읽었다.
“전하, 11월 24일 홍건적이 개경에 입성하였다 하옵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남진을 시도하진 않고 있다 하옵니다.”
“으음, 그날 이천현에 있을 때 바위가 쪼개져 뒹굴고 천둥번개가 내리치더니만…….” 

공민왕과 이제현은 예상했던 사태지만 이 참상 소식을 듣고 함께 피눈물을 흘렸다. 이제현은 귓가에 어지러운 이명(耳鳴)이 윙윙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눈앞에서, 태조 왕건 대왕이 세운 고려가 불꽃과 연기에 휩싸여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광경이 펼쳐지는 듯했다. 
이제현은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공민왕에게 말했다.
“전하, 홍건적이 더 이상 남진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하늘이 우리 고려에게 재기의 기회를 베풀어 주신 것이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전하께서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지금 겪고 있는 간난(艱難)을 꿋꿋하게 헤쳐나가시면, 반드시 개경을 탈환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 용기를 잃지 마시옵소서.” 
 공민왕은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개경 탈환의 그날이 과연 올까요?”
“천지운행(天地運行)의 변수는 하늘만 알뿐이옵니다. 남을 위압하는 자는 반드시 망하고, 천의(天意)에 복종하는 자는 반드시 흥할 것이옵니다. 오늘의 고초가 후일에는 반드시 영광으로 바뀔 것이옵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더 이상 움직일 기력마저 잃어버린 공민왕은 청주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이때,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가 된 딸 혜비 이씨가 이제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버님, 연로하신 몸에 몽진길이 힘이 부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혜비마마, 신은 살만큼 산 늙은이입니다. 신에게는 사직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은 전하와 혜비마마의 강녕함입니다. 늙은이의 건강이 무에 그리 대수입니까.”
“아버님, 아버님의 연세에 더 이상의 호종은 위험하옵니다. 청주까지 호종을 하셨으니 전하께서도 아버님의 충정을 이해하실 것이옵니다. 이곳 청주에서 쉬시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시고 개경 환도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승선 이색도 혜비의 생각에 동조했다.
“스승님, 혜비마마의 뜻에 따르소서.”
딸의 지극한 효성에 이제현은 눈물이 핑 돌았다.
“혜비마마, 이 노신은 마마의 지극한 뜻을 따르겠습니다. 청주에 머물면서 개경으로 환도할 수 있는 방책을 찾아보겠습니다.” 
 종묘사직을 걱정하는 마음은 아버지 못지않은 혜비였다.
“아버님, 힘든 몽진을 끝내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갈 날이 과연 올까요?”
“혜비마마, 심기를 굳건히 하시기 바랍니다. 홍건적의 목적은 물자 확보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한성(漢城, 경기도 광주의 옛 읍과 남한산성) 이남인 하삼도까지 무리하게 침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고려군이 홍건적의 남진을 지연시켜 시간을 벌어 전열을 정비한다면 다시 개경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세운 장군에게 서찰을 보내다

며칠 후, 청주를 떠난 어가행렬은 복주(안동)로 향해서 출발했다. 
이제현은 홀로 청주에 남았다. 사위와 딸을 먼 고장으로 떠나보낸 그는 임시 거소에서 하루 낯 하루 밤을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혼신의 힘을 쏟아 공민왕을 호종하는 정세운 장군에게 보낼 서찰을 써내려갔다. 가복인 만복이 이제현의 부름을 받고 다가왔다.
“만복아, 이 서찰을 정세운 장군에게 전하고 돌아오너라. 만약 이 서찰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종사에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임을 명심하고. 험로(險路)에 조심해 다녀 오거라.”
“알겠사옵니다. 시중 어르신.”
서찰을 가슴 깊숙이 품고 검은 말에 올라 탄 만복은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은 눈길을 비호처럼 질주했다. 하루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을까. 어가행렬은 문경새재에서 쉬고 있었다. 만복은 초병들에 의해 정세운 장군에게 안내되었다. 연전에 수철동 집에서 본 적이 있는 정세운은 짙은 눈썹과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에 위풍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만복은 정세운에게 인사를 했다.
“장군님, 소인은 익재 시중을 모시고 있는 만복이라 합니다.” 
“음, 자네가 어인 일인가.” 
“시중 어른의 서찰을 장군님께 전하러 왔습니다.” 
정세운은 먼 길에 고생했다는 인사말조차 잊은 채 만복이가 건네준 서찰을 개봉해 읽기 시작했다.

정세운 장군에게.
정 장군, 금상을 호종하느라 험로에 노고가 많소이다. 나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복주까지 금상을 호종하지 못하게 되었소. 나는 정 장군의 범같은 기개와 백전불퇴의 용맹을 믿고 있소.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니 개경탈환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오.
첫째, 전쟁을 이기려면 위아래가 뜻을 같이하여야 하오. 복주에 당도하는 즉시 금상께 진언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리도록 하시오. ‘부모없는 자식 없고 백성 없는 나라 없다’는 말이 있듯이, 백성이 국가의 기본이라는 인식이 국난극복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며, 기본이 공고해야만 군신과 백성이 혼연일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법이오. 
둘째, 홍건적의 침략 목적은 물자 확보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한성 이남인 하삼도까지 무리하게 침략하지는 않고 개경을 사수하는데 전력을 쏟을 것이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하였소. 적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이긴다는 것이오. 적들이 움직이지 않는 동안 여러 도의 군사들을 독려해 개경에 집결해서 개경탈환에 총력전을 펼 수 있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시오. 
셋째, 손자병법에 ‘전쟁이란 궤도(詭道, 속임수)이다’ 라는 원칙과, ‘상대방의 갖춤이 없는 것을 치고, 상대방이 전혀 뜻하지 않았던 곳을 공격한다(攻其無備 出其不意 공기무비 출기불의)’는 말이 있소이다. 따라서 기상천외한 계책으로, 방어하고 있는 적의 가장 약한 부대를 공격하기 보다는 적의 주력부대를 먼저 쳐서 대세를 장악하는 방편이 있다는 것도 유념해주기 바라오. 
넷째, 우리의 목적은 적들을 압록강 너머로 몰아내는 데 있으므로, ‘궁한 도적은 쫓지 말아야 한다(窮寇勿追 궁구물추)’는 말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위·촉의 오장원 전투에서 제갈량의 죽음을 안 사마의가 철수를 개시한 촉군을 추격하여 섬멸하지 않은 것은 복병에 의한 쓸데없는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한 것이었음은 정 장군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정 장군!
두서없는 늙은이 우견(愚見)이 종사의 안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오늘 당장 이곳에서 눈을 감더라고 여한이 없겠소이다. 정 장군의 무운을 빌 뿐이오.
                                                           11월 26일. 익제 이제현 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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