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대접 받았던 농민들, 타격 입을까 우려↑

‘WTO개도국지위 유지 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달 2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한국의 WTO 개도국 지위 유지를 촉구했다. [뉴시스]
‘WTO개도국지위 유지 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달 2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한국의 WTO 개도국 지위 유지를 촉구했다. [뉴시스]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정부가 지난달 25일 세계무역기구(WTO) 내 개발도상국 지위를 앞으로 유지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면서 향후 우리 쌀을 비롯한 농업 분야에 어떤 타격이 미칠지 주목된다. 농업계는 거센 항의에 나섰고, 야는 농업 분야에 미칠 피해에 대해 한목소리로 우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단언한대로 WTO의 농업협상이 사실상 끊긴 상황이라 당장 농업분야에 미치는 영향이 없겠지만, 앞으로 협상이 재개될 경우에는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공익형 직불제등 대안 내놨지만 해법 될지 미지수

현 시점에서 향후 협상이 언제 열릴지는 예측이 힘들지만, 불안에 휩싸인 농민 단체들의 반발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개도국 지위를 둘러싼 농업계와의 갈등을 봉합하는 일이 농정 당국의 최대 과제로 남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농림축산식품부 등 관계 부처들은 앞으로 열릴 WTO 주관 협상에서 개도국의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WTO 체제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은 없다. 결국 개도국 지위는 개별 협상에서 국가들의 자기 선언에 달려있는 것이다. 한국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개도국 지위를 내려놓을 것을 요구받았으나, 농업 분야는 여전히 개도국 수준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특혜를 유지해 왔다.

1995WTO 출범 이후 24년이 흐른 현재, 정부는 우리 경제의 수준을 고려할 때 더 이상 개도국 특혜를 유지할 명분이 없다고 판단했다.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세계 12위로, 선진국 수준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한국은 164WTO 회원국 중 OECD와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이자 국민 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서는 9개 국가에도 포함된다. 한국과 경제 규모, 위상 등이 비슷한 수준인 싱가포르, 대만, 브라질 등 국가들은 일찌감치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밝힌 상태다.

문제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농업계에 미칠 타격이다. 그간 한국은 개도국으로서 농산물 분야에 선진국 대비 3분의 2 수준 관세 감축 의무만 이행해 왔다. 농산물 등 특별 품목에 한해서는 감축 의무를 면제받기도 했다. 의무적으로 감축해야 하는 보조금 규모도 커지게 된다. 관세와 보조금은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의무 차이가 가장 큰 분야이다.

, 한목소리로 우려

자유무역 체제에 편입되면서 한국은 다수의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 왔지만, 농산물만은 예외적이었다. 인삼(754%), (513%), 마늘(360%), 감자(304%), 고추(270%) 등 품목에서 고율의 관세가 허용됐다. 미래 협상에 따라 관세율이 낮아지면 외국산 농산물들이 밀려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특별 품목들에서 관세가 감축되면 언젠가는 그 영향이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며 그에 대한 준비가 돼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당장의 피해는 없지만, 미래에 닥칠 타격이 없다고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개도국 특혜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지난 726일 이후 석 달이 지나는 동안 농업계와 충분히 소통하지 못했다. 농업계는 거센 항의에 나섰다. 정부가 뒤늦게 농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주요 농민 단체는 불참했다. 이들은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격렬히 저항하기도 했다. 같은 날 전남충남 등 농업이 주산업인 지역에서도 규탄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국회에서도 움직임이 감지됐다. 농림축산심품해양수산위원회(농해수위)는 여야 의원들이 만장일치로 개도국 지위 유지를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농해수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황주홍 민주평화당 의원은 긴급 성명서를 내고 국내 다른 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농업 분야의 피해를 최대화하겠다는 반농업적 판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정부의 이번 결정이 무대책, 무대응이었다고 강하게 질책했다.

이창수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이 농업은 우리 생명이고 안보라고 말해 온 결과가 이것이냐. 대통령과 정부는 개도국 지위 포기를 결정하기 전에 직접적인 피해를 받을 농업계와 어떤 논의를 하기는 하였냐면서 농업에 대한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결국 정부는 무대책, 무대응이라고 힐난했다.

이어 농업계를 설득하거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은 했나. 농업계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기적 생색내기 대책이 아닌 실질적이며 실효적 대안은 준비해 놓았느냐라며 이번에도 문재인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책 결정에 대한 피해와 책임은 농민과 국민의 몫인가. 국민은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국익을 고려한 결정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미중 무역분쟁 등 변화하는 대외무역 환경과 높아진 우리의 경제적 위상국익을 고려한 결정으로 이해된다면서 정부는 피해보전위주의 소극적인 대책에서 벗어나 우리 농업의 경쟁력과 농민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부가 WTO 가입 시부터 농업과 기후변화 분야에서만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아 왔기 때문에 큰 피해가 없을 것이며 농업 분야에서도 기존 협상을 통해 이미 확보한 특혜는 변함이 없으므로 당장 영향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이 농민들의 불안과 우려를 불식시키고 농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는 없다고 전했다.

농민들을 우습게 만든 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정부의 대응이 소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정빈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정부도 인정하고 있는 만큼 적극적으로 농업계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부족했다면서 “(시한이 닥쳐서) 막판에 이런 식으로 결정하면 사회적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농민들을 우습게 만든 꼴이라고 지적했다.

내년 농업 예산은 153000억 원으로 전체 예산(5134000억 원)의 약 3%를 차지한다. 임 교수는 예산 규모를 보면 그간 농업은 푸대접을 받아 왔다면서 특히 현 정부가 농업농촌을 더 홀대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올해 대비 농업 예산 증가율이 4.4%로 최근 10년 이래 가장 높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또 지방 분권에 따라 이양된 사업까지 합치면 농업 재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4.3%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도 설명한다.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의 농정 공약이기도 한 공익형 직불제도입을 대안으로 내놓은 상황이다. 공익형 직불제가 WTO에서 규제하는 보조금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는 것과 무관히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다. 직불제 관련 예산은 정부안 기준 내년 22000억 원 규모로 반영돼 있다. 농업계에서 관련 예산 확대를 지속해서 요구하고 있는 만큼 정부는 직불금 예산도 향후 안정적으로 확보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이는 개도국 이슈가 불거지기 전부터 추진돼 온 정책이라는 점에서 명확한 해법이 될지는 미지수다.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 전에 그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직접적 이해 관계자인 농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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