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진 교수
정범진 교수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지속적으로 위험에 노출된다. 교통사고, 범죄, 질병, 천재지변 등 위험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안전이란 없다. 이러한 위험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수용의 한도’를 넘어서는지 아닌지에 따른다. 그러나 수용의 한도 근처에 있으면 위험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한다. 교통안전 캠페인이 그런 것이다. 반면 벼락을 맞는 것과 같이 극히 드문 사안은 그냥 받아들이고 산다. 

때로는 이러한 위험성에 대한 인지가 뒤바뀌는 경우가 있다. 드물게 예방접종의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예방접종으로 인한 질병 예방이라는 긍정적 효과와 부작용이라는 부정적 효과를 비교하여 전자가 훨씬 크다면 예방접종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이성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드물게 나타나는 부작용의 피해자가 나와 내 가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발명에 대하여 극단적인 NGO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 다음에 채택하라!’는 주장을 한다. 소위 사전예방의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이 주장은 일견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이 주장의 근본적인 문제는 절대 안전(Zero risk)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절대 안전은 없다. 즉 이것은 불패의 질문이다. 문명의 이기 가운데 어떤 것도 이 주문에 맞출 수 없는 것이다. 

미국 원자력안전규제위원회(NRC)는 원자력 안전규제의 원칙으로 ‘원자력시설의 건설과 운영으로 인하여 대중의 건강과 안전에 부당한 위험을 끼치지 않는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부당한 위험을 끼치지 않겠다는 말은 정당한 위험은 끼치겠다는 말이다. 시설이 있는데 아무런 위험이 없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정당한 위험수준이 얼마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학적으로만 결정될 사항이 아니다. 사회경제적인 요소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어떤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위험의 수준은 그 사회의 경제적 수준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1979년 미국 TMI-2 원전사고와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4호기 원전사고가 그 극명한 예이다. 미국 원전은 원전 전체 건설비의 25%를 차지하는 격납용기라는 밀폐건물을 갖추었다. 체르노빌원전은 그렇지 않았다. 그 결과 TMI-2 원전사고는 원자로심의 절반이 용융되는 심각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방사성물질이 유출되지 않았다.

반면 체르노빌 원전사고에서는 엄청난 방사성물질이 유출되었다. 이 극명한 차이는 구소련의 무지가 아니라 설계 개념의 차이였다. 땅이 넓고 인적 보상비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구소련에서 안전에 많은 투자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규제는 미국의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또한 원자력 발전소의 수출을 위해서는 이러한 규제의 기준이 항상 선진국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나라 원자력에 대한 안전규제의 수준은 다른 산업부문에서 적용하고 있는 안전기준에 비해 사치스러울 만큼 높다. 

원자력발전은 다른 위험요소보다 훨씬 안전하다. 지난 40년간 원자력산업의 방사선으로 인하여 사망은커녕 다친 사람도 없다. 이러한 산업을 위험하다고 한다면 그건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1960년대 원전에 대한 안전규제를 시작할 때 원전의 위험도는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위험도의 1/1000 정도로 설계되었다. 이 정도가 당시의 정당한 위험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보다 더 강화되었다.

성숙한 시민이라면 우리나라와 같이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수입에 의존하지 않는 준국산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고 좁은 땅에서  고밀도의 에너지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또 당연히 정당한 위험은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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