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했다. 억울하기보다 미안한 마음밖에 없다”

강동희 전 농구감독
강동희 전 농구감독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2013년 ‘승부조작’ 혐의로 KBL로부터 제명당한 강동희 전 농구감독. 코트를 떠난 지 7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강 전 감독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요서울이 강 전 감독의 흔적을 찾아봤다. 그가 현재 인천에 위치한 동남스포피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기자는 지난달 30일 오후 인천에 있는 동남스포피아로 강 전 감독을 만나러 갔다.

 

‘한국 제1의 농구교실’ 된 팀K, 프로선수들 은퇴 모델로

농구선수 활동하는 두 아들 “동급생에 비해 달리지는 않는 정도”

 

-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

▲ 정해져 있다. 특별한 일 없으면 사무실에 온다. 아이들 가르치거나 지인들 만난다. 주말에는 우리 아이들과 엘리트 학생들 교육시킨다.

- 농구교실은 전국에 몇 개나 운영하나.

▲ 전국에 22개 지점이 있다. 회원 수는 7천 명 정도다. 가장 많을 때는 전국에 32개 지점에 만여 명의 회원이 있었다. 현재 직원 수는 100여 명이다.

- 팀K(강동희 농구교실)를 어떻게 시작했나.

▲ 1999년 현역 선수이던 시절 고등학교 농구선수 출신 친구들이 있었다. 4명이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제의했고 이름 쓰는 걸 요청했다. 그 당시 구단에서 허락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결정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쓰게 허락을 하고 운영을 맡겼다. 이후 회원 수가 많이 늘었다.

당초 시작할 때는 유소년 농구 저변 확대와 프로선수들이 은퇴 이후 지도자 생활밖에 할 게 없었기 때문에 선수들이 은퇴 후 농구교실을 열면 어떨까 싶어 시작했다.

- 20년 동안 성장시켜 온 농구교실 뿌듯하지 않나?

▲ 처음에 시작할 때는 정말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이었고 그게 될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시작할 때 현역이라 주말에만 와서 운동장에서 아이들 가르쳤고 했다. 새벽부터 흙바닥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힘들어도 잘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다. 그런 게 하나하나 쌓여서 친구들이나 직원들 다 같이 잘 끌어 왔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한국 제1의 농구교실’이 됐다.

- 두 아들도 농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 아직까지 잘하고는 있는데 처음 시작할 때 만류했다. 운동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 때문에. 또 제가 감독을 하면서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면 모르지만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돼서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상황에서 아들들이 운동한다는데 시키고 싶겠나. 그냥 취미로만 하라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이들이 농구할 수 있는 학교로 전학시켜 달라고 하더라. 시작할 때 그랬다. 키가 안 크거나 재능이 발견되지 않으면 접어야 한다고 약속하고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시작하고 나서는 잡을 수가 없었다. 왜 아빠가 자기들 꿈을 막냐고까지 하더라.

- 두 아들의 농구 스타일과 실력은.

▲ 첫째는 농구 리듬이 좋은 것 같다. 드리블, 슈팅 등은 좋은데 기질적인 게 첫째스럽다. 운동선수는 숨어 있는 것보다 싸움 기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성향이 부족하다. 열심히는 한다. 코트에 들어가면 상대를 제압하려고 하고 지면 더 승부욕이 발동해야 하는데 그런 게 부족하다.

둘째는 기술적인 것은 형보다 부족한데 승부욕은 있다. 키도 둘째가 좀더 클 거 같고 첫째는 내가 생각하는 키보다는 작을 것 같다. 결국은 둘 다 키가 문제다. 신체적인 게 받쳐주고 고등학교 2~3학년 돼야 그림이 나온다.

지금은 같은 초등학생, 중학생에 비해 별로 달리지는 않는 정도다. 또래보다 기술이 좋을 뿐이다.

-‘승부조작 사건’다시 생각해 본다면.

▲ 끔찍하다. 내 인생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닥칠까.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내게 왔다. 사람이 살면서 강도 한 번 당하기 쉽지 않지 않나. 그런데 일생에 정말 한 사람한테 불행이 찾아온다고 봤을 때 내가 찾아다닌 것도 아니고 10년 동안 아는 후배를 통해서 일이 벌어졌다.

당시 2011년이니까 승부조작에 대한 의혹이나 예가 전혀 없었다. 무지했다. 아마에서 프로가 되면서 시스템 교육 이런 게 전혀 없다 보니, 운동만 하다 보니 사회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어쨌든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내 책임이 가장 컸다. 준공인이었다. 너무 쉽게 생각을 했던 거다. 정규리그 마지막 시합 순위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계속 거절했었다.

선수 뺄 테니 돈을 가져와라 짜고 그런 적 없다. 항소해서 법정에서 다시 소명한다는 게 너무 창피했다. 내가 주도를 했건 안 했건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항소하지 않았다.

- 영구제명 억울하지 않나.

▲ 억울한 것보다는 미안한 마음밖에 없다. 가족이나 농구교실 애들이나 주변에 저를 사랑해 줬던 팬들이나 농구 관계자 선후배들한테 미안한 마음밖에 없다 너무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저로 인해 프로농구 인기가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했다. 저로 인해 여러 가지 농구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 아닌가, 그래서 미안한 마음밖에 없었다. 조그만 돈이라도 받았던 게 창피해서 내 자신이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제가 받았던 돈은 다 돌려줬다.

이후 축구계 비리가 터졌다. 정말 무서웠다.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2년 넘는 기간에 너무 힘들었다. 잠을 못 잘 정도였다.

영장실질심사를 받을 때는 정말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이 지켜줬다.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에 내가 너무 무책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농구의 모든 걸 다 내려놓더라도 아버지로서 역할은 버리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더라. 10개월 수감 생활도 힘들었지만 가족이 지켜줬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 농구코트로 돌아오고 싶지 않나?

▲ 전혀 없다. 복귀보다는 계속 재능기부 같은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싶다. 우리 두 아이가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해서 사면이 돼서 편하게 농구장을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애들 시합을 하는 데도 못 간 경우가 많다. 농구인들 계시는데 제가 인사드리는 것도 송구스럽고 해서 잘 안 갔다. 농구장에서 선후배 만날 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그 정도만 돼도 좋겠다. 그러면서 재능기부 등 할 수 있는 것 다 하고 싶다.

쉽지 않을 거다.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고 제도적으로 봤을 때는. 사람들 앞에 자신 있게 못 서는 건 평생 안고 가야 할 부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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