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시민사회단체의 내로라는 인물들이 현실정치에 뛰어들겠다며 1,000인 선언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중심에 박원순 변호사가 설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거기에 없었다. 참여연대를 6년 동안 이끌면서 낙천낙선운동, 정치개혁 입법 발의 등 정치와 무관치 않은 활동을 왕성하게 펴왔던 그가 정치정당화 작업에는 정작 발을 뺀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 운동이 우리 사회의 중심에 서있고, 그것만으로도 정치운동을 하고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방향은 일관되되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그는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이나 대선자금 특검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권위주의 정권시절 권력자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던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검찰의 독립적 위치가 확보돼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은 오히려 대통령이 엄격한 도덕성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과감하게 받을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 시민단체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정당 발의를 했을 때 맨먼저 박변호사가 중심이 될 것으로 알았는데 전혀 이름이 보이지 않더군요.
▲“한 사람쯤은 시민단체를 지켜야죠. 시민단체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한다고 해서 일도양단으로, 흑백논리식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같은데 그건 잘못된 논리입니다. 그들은 더 좋은 정치를 할 소양있는 사람들이죠. 제가 나서지 않는 것은 역할분담을 하자는 것입니다. 저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언제 (현실정치에)뛰어들지는 모르지만 이 시기에 중요한 제 임무는 시민운동을 좀더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 정치를 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도 이해되는데, 혹 정치를 한다면 의회 쪽이 낫습니까, 시민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다루는 서울시장 등 예산을 집행하는 쪽이 낫습니까.
▲그러자 박변호사는 펄쩍 뛰었다. 유도 질문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그런 것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 그동안 참여연대를 통해 낙천낙선운동 등 정치적 발언을 많이 하셨는데요.
▲“저는 지금도 정치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아요. 저 역시 제도권에 들어갈 기회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도 훨씬 많은 롤(역할)이 있습니다.”

- 직접 뛰어들어도 안되는데 외곽에서 한수 ‘지도’하려면 더 힘들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는 심각한 게 많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행태에서 오는 것이 많습니다. 패러다임이 바뀌고 국민의식이 달라지면 정치도 바뀌고 좋은 사람들이 들어가야 하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절망적입니다. 선진화는커녕 근대화도 되어있지 않아요. 조선조때 확립된 공직자 윤리관도 없어요. 조선조의 관료제도는 그 나름으로 문제가 있지만 시대적 사표가 되었죠. 이는 중심이 썩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정치를 보면 근대적 의미의 공직자 윤리시스템이나 공공적 시스템이 전혀 작동되지 않고 지역감정을 지렛대 삼아 형편없는 사람들이 정치인이라고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민단체나 언론의 책임도 크다고 봅니다.”그렇더라도 정치의 밖이 나아지고 있기 때문에 실망할 단계는 아니라고 진단했다.금기시됐던 대선자금을 검찰이 직접 다루는 것도 그런 변화중의 하나라고 했다.

- 정치 불신은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는데, 획기적인 대책이 없을까요.
▲“쓸만한 사람들이 정치권에 수혈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이는 유권자의 책임이 크죠. 깐깐한 유권자가 꼼꼼한 선택을 했다면 이런 결과는 자초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는 제도의 문제 아닙니까.
▲“물론 선택권의 제약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안은 있어요. 지역감정 문제로 영남에서 민주당 의석이 나올 수 없고, 호남에서 한나라당 의석이 나올 수 없다고 하지만 무소속을 당선시키거나 민노당을 뽑아줄 수 있다는 것이죠. 얼마전 호남지방을 갔다 왔는데 민주당 출신의원에 대한 불만이 많더군요. 이런 것들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 대안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 지역주의 해소 방법에 대해 누구나 이야기합니다만, 여전히 그것은 배운 사람, 이성적인 사람에게조차도 감정적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래서 암담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것인가요?
▲“미래에 대한 진보를 저는 믿습니다. 분열주의적 부정적 지역감정의 행태는 해소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지금의 정치인에게서는 그걸 해결할 역량보다 오만성이 더 많아 보입니다만, 분명 정치는 개편 과정에 있습니다.”그는 의외로 낙관적 시각이다. 정치자금과 선거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를 상당한 역사 발전으로 거듭 평가했다. “과거 같았으면 부패 정치인을 소환해 수사한답시고 시늉만 하거나 적당히 정치적 봉합을 해버린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편파적 수사를 한다면 생존할 수가 없어요. 국민의 민도는 정치의 지수를 훨씬 앞지릅니다. 제가 듣기로는 청와대 지시도 없다고 봐요.”

- 얼마전 일부 신문엔 청와대에서 특검비리 대책회의가 있는 듯이 보도됐는데요.
▲“부장 몇이 만나 회의했다는 것이 무슨 대책회의일까요. 팩트에도 맞지 않다고 봐요. 저는 대선자금 담당 검찰들을 만나 조언도 해주었지만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 특검제 도입을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검찰이 하도록 믿어야죠. 야당이 정치공세를 펴고 있지만 검찰이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전과 다르다는 것이 국민적 성원을 받는 것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다만 대통령 측근 비리를 다룰 특검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법무장관도 법안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위헌 제청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나 과감하게 이를 받았으면 해요. 측근 수사의지가 천명되면서 엄격하게 비쳐지죠. 대통령이 과감하게 이를 받아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본다면 정략적으로 이용할 것이라는 부작용을 우려할 수 있는데요.
▲“한나라당이 다수당의 횡포를 부릴 만큼 사회환경이 썩 유리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지난번 SK가 한나라당에 100억원의 대선자금을 제공했다는 보도가 나온 이래 한나라당의 인기 추락을 보십시오. 정략적으로 대응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 이런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면 역시 현실 정치에 뛰어드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하지는 않습니까.
▲“저는 우리 사회가 성숙되고,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인간적인 사회, 삶의 질이 확보되는 시민사회가 되도록 나름으로 노심초사해왔습니다. 이런 고민들이 정치와 다를 것이 없어요. 어떤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제도권에 진입해 자리에 연연하기보다 우리 사회의 본질을 바꾸는 것을 고민해왔던 것이 사실이고, 그런 면에서 저의 발언이 지금도 제도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봅니다. 제도권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한나라당의 젊은 의원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요란한 당사를 팔거나 임대해서 투명한 정치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어요. 그랬더니 소장파 40명이 서명을 해서 당사 처분 동의안을 내놓더군요.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의도의 비싼 건물을 임대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양평동의 공장건물을 빌려서 사무실을 개조해 쓰고, 의원들이 셔틀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 아름다운 재단설립과 아름다운 가게 운영으로 새로운 시민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실적은 어떻습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름다운 가게는 적어도 정치집단보다 우리 사회의 변화의 중심에 서있다고 자부합니다. 지금까지 기금이 100억원 이상이 들어왔는데 금년 목표 60억원을 넘어섰고, 연말까지는 120억원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재단은 기부문화를 확산시켜보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던 것이고, 나눔과 순환이라는 분배의 정신, 분열과 갈등, 적대적 관계보다는 통합과 소통을 통한 민간의 영역을 확대해보자는 것인데, 이처럼 따뜻하게 사람과의 관계가 원활하게 소통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저도 놀랄 정도입니다.”3년전 설립된 아름다운 재단은 뒤이어 아름다운 가게 3곳(서울 안국동 독립문 삼선교점)을 세웠으며, 금년에는 8곳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곧 동대문점을 개점할 계획이고, 광주 대구 인천에도 세워진다. 나눔과 순환을 생활속에서 실천해보자는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가는 추세에 있는 셈이다.

- 천주교 꽃동네와 같은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 개연성도 미리 막을 대비도 하고 계시겠지요?
▲“투명성의 문제인데, 우리는 장부를 인터넷에까지 다 올리고, 특히 직원들의 월급까지 올리고 있지요. 다음으로 독립성의 문제인데, 우리는 SOS 리서치라는 장치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부할 대상을 선정하는데 제가 요청해도 거부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부자 투표를 통해 결정하니까요.”기부금은 태평양의 타계한 서성환 전회장 유족이 내놓은 50억원, 솔 출판사와 현암사가 각각 4억원씩 출연한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1% 나눔운동에 참여하는 개미들의 참여에 의해 확보되고 있다. 아름다운 재단은 월급 인세 공연비 기업수익 자영업자 수입 1% 기부운동을 펴고 있고, 아름다운 가게는 집에서 쓰다 버릴 물품을 받아 수선하여 필요한 사람에게 헐값으로 주는 가게 운영을 하고 있다.

박변호사는 이 운동을 통해 참여와 신뢰를 쌓는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국민이 정이 많아서 좋은 뜻을 제대로 펴는 주체만 있다면 나눔에 참여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고도 소개했다.“참여자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많습니다. 행상, 구두닦이 이창식씨를 비롯해 정부로부터 생계비 지원을 받는 사람이 나눔운동에 동참하고 있어요.”아름다운 가게는 쓰다가 버린 헌 물건을 기부받아 수선하여 판매하기 때문에 수익이 100% 남는 사업이다. 여기 참여하는 세탁공 수선공 전공 등이 모두 자원봉사자다. 각 점포의 점장 역시 자원봉사자다. 수익금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탁된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심장병 질환을 앓고 있는 산업체근로자 치료비를 지급했고, 정신지체 아동과 신체 불편한 노인들이 수용되어 있는 경기 구리시의 한나의 집 시설비 지급, 동두천 기지촌의 고연령 매춘여성을 위한 재활 사회복지 기금 지원, 경남 지역의 태풍피해 농민 지원, 불우한 학생 장학금 등으로 쓰였다. 크리스마스에는 7,000만원 가량의 기금을 지원할 계획이다.

-아름다운 가게는 계속 늘어나겠지요?
▲“전국 시군구에 하나 이상 세울 계획입니다. 아름다운 가게는 자원 재활용이란 측면, 헌 물건에도 주인이 따로 있다는 절약정신과 재활용의식을 심어주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죠.
▲저는 누구에게도 배우고 살아옵니다. 다만 세속적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다 버리니 다 얻더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사실 저는 96년 이후부터 변호사생활을 그만두다시피 했습니다. 수임료 수익도 대단할 텐데 변호사 업무를 중단했느냐는 얘기도 듣지만 굶지 않고 사는 정도라면 괜찮은 삶이죠.”얼마전 굴지의 호텔을 경영하는 회장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당신이 필요하다면 호텔 전용 방을 줄테니 필요할 때 쓰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외국 손님들이 올 경우 접대하려다 보니 필요하다는 생각도 한다. 한 스님에게서 자신의 사찰 황토방을 사용하라는 제안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온 세상이 내 별장”이라며 웃었다. “버리니 채워지더라”는 것이다.“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거짓말은 잠시 속일 수는 있지만 영원히 통용되지는 않거든요. 무식한 사람이 유식한 체 하지만 결국에는 들통이 나게 마련이죠.” 그는 늘 뒷줄에 서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

가운데, 즉 중앙에 서있으면 불안하다는 것이다. 누군가 써준 휘호 ‘대덕득기위(大德得己位)’라는 글귀를 좋아한다. 큰 덕에서 자리를 얻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일을 열심히 하되 덕을 쌓고, 능력을 키우면 자리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리를 얻으려고 노력하거나 로비까지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죠.” 참여연대 시절 박변호사는 이지적인 얼굴 그대로 날카롭고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둥글고 여유 있고 넉넉해 보인다. 삶의 방식, 운동의 방식이 달라지면서 얼굴의 관상도 변화하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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